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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소소한 영화관] 엄마, 딸 그 이상의 이야기 '바람의 언덕'

부수정 기자 (sjboo71@dailian.co.kr)
입력 2020.04.24 13:35 수정 2020.04.24 13:35

'꽃' 시리즈 3부작 박석영 감독 연출

정은경·장선 주연 일상적인 연기 '호평'

<수백억대 투자금이 투입된 영화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영화의 재미와 의미를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선한 스토리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작지만 알찬 영화들이 있습니다. 많은 스크린에서 관객들과 만나지는 못하지만, 꼭 챙겨봐야 할 영화들을 소개합니다.>

'바람의 언덕' 포스터.ⓒ영화사삼순 '바람의 언덕' 포스터.ⓒ영화사삼순

딸을 버린 엄마가 딸을 찾고선 소리친다. "난 네가 미워. 너 때문에 난 훨훨 다 할 수 있었는데 못했어!" 그러자 딸은 얘기한다. "나는 안 미워, 한 번도 안 미웠어. 난 어떻게 미워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보통 이 상황에서 엄마는 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오열하고, 딸은 "엄마가 미웠어"라고 원망할 텐데, 박석영 감독의 '바람의 언덕'은 이를 완전히 뒤집는다.


'들꽃'(2015), '스틸 플라워(2016)', '재꽃'(2017)으로 꽃 시리즈 3부작을 완성한 박 감독의 따뜻한 시선을 거친 영화 '바람의 언덕'이다.


영화는 딸을 버린 엄마 영분(정은경 분)과 그런 엄마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딸 한희(장선 분)의 이야기다. 남편과 사별한 영분은 고향인 강원도 태백으로 돌아온다. 모텔에 거처를 자리 잡은 그는 모텔 청소를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영분은 자신이 버린 딸 한희가 태백에서 필라테스 강사로 일하고 있는 걸 알게 되고, 딸을 보고 싶은 마음에 필라테스 학원을 등록한다. 딸 한희는 겉으론 생글생글 웃지만 속은 문드러졌다. 필라테스 학원에서 텐트를 치고 자는 그는 밤마다 거친 숨을 내쉬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틴다.


어긋난 모녀는 필라테스로 다시 인연을 맺는다. 필라테스 운동 특성상 손과 손을 맞잡으며 친근감을 느낀다. 영분은 엄마라고 떳떳하게 밝히지 못한 채 학원 홍보 전단을 거리마다 붙이며 딸을 남몰래 챙기려 하지만, 딸은 전화 한 통을 받고 엄마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바람의 언덕' 포스터.ⓒ영화사삼순 '바람의 언덕' 포스터.ⓒ영화사삼순

'바람의 언덕'은 사연 많은 모녀의 이야기를 흔하지 않게 들여다본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딸이 엄마를 미워하는 설정, 엄마가 딸에게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없다. 오히려 딸이 엄마의 세월을 짐작하며 위로해줄뿐이다. 엄마는 그런 딸을 마주하고 켜켜이 쌓아둔 마음의 짐을 덜어놓는다.


인간이 그렇듯, 영화 속 인물들은 외롭고 쓸쓸하다. 외로움의 중심에는 두 모녀가 있다. 오랜 시간 떨어져 각자 인생을 사느라 지칠대로 지친 둘은 그토록 꿈꿔왔을 재회 순간에도 그간의 이야기에 대해 시시콜콜 논하지 않는다. 모녀를 떠나서 개인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존중하려는 감독의 따뜻한 태도가 엿보인다.


극 중 택시기사 윤식(김준배 분)이 영순에게 던진 "사람은 다 그 나이대의 진실이 있다"는 말도 그렇다. 감독이 김준배 배우를 마주했을 때 배우가 직접 한 말로, 후회로 가득찬 우리에게 "괜찮다"고 다독이는 위로처럼 들린다.


엔딩도 모녀가 극적으로 화해하는 뻔한 결말로 마무리짓지 않는다. 바람의 언덕에 오른 모녀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넘어 각자 인생을 사는 독립된 개인으로 진솔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간 마주했던 두려움, 공포, 미안함을 털고 서로 미소 짓는 모녀의 모습은 잔잔한 울림을 준다.


박 감독은 삶에서 가장 많이 지켜본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썼다. 흔히 여성에 기대하는 엄마로서의 역할, 이미지, 편견을 깨부수고 가슴에 스며드는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배우들의 연기엔 엄지가 올라간다. 주변에 있을 법하고, 실제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는 듯 연기가 자연스럽다. 박 감독은 "캐릭터 성격, 특징은 배우들에게서 나왔다. 엔딩 장면도 배우들이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배우들 공이 컸다"고 말했다.

부수정 기자 (sjboo71@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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