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영 신화에서 최대 부도까지'…김우중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입력 2019.12.10 10:23
수정 2019.12.10 14:10
만 30세 대우실업 창업, 재계 2위의 대우그룹으로 키워…외환위기 이후 몰락
수십조원대 분식회계 혐의로 복역…말년엔 베트남서 청년사업가 양성에 주력
만 30세 대우실업 창업, 재계 2위의 대우그룹으로 키워…외환위기 이후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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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83세로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한때 재계 2위 그룹의 총수에 올랐다가 역대 최대 규모의 부도를 낸 뒤 해외도피 생활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시절을 보냈다.
고인은 1936년 대구 출생으로,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의 성공신화는 만 30세였던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6년까지 섬유회사인 한성실업에서 일하던 '청년 김우중'은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1967년 창업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으로 시작한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렸고 이후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뒀다.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대우그룹 축성의 종잣돈을 마련한 김 전 회장에겐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또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대우의 첫 브랜드인 영타이거를 알렸던 고인은 동남아에서 '타이거 킴'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고인은 '대우신화'라는 신조어와 함께 샐러리맨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성장 가도를 달렸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 지사를 세웠고,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연 이후 김 전 회장이 이끈 대우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창구로 발돋움했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1976년 한국기계(대우중공업)와 1978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조선공사(대우조선해양) 등 부실기업을 인수, 단기간내 경영정상화를 이뤄 한국의 중화학산업화를 선도했다.
대우그룹은 또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에 활발히 진출했다. 그 결과 창업 15년만에 대우는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로 성장했다.
김 전 회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두드러진 기업인으로 주목받았다. 박 전 대통령이 김 전 회장의 부친이 대구사범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절친한 사이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회장은 1980~90년대에도 '세계경영'에 매진했다. 1980년대 무역·건설부문을 통합해 ㈜대우를 설립(1982년)하고 그룹화의 길에 들어선 후, 자동차·중공업·조선·전자·통신·정보시스템·금융·호텔·서비스 등 전 산업의 내실을 갖춰 세계진출을 본격화했다.
1983년엔 국제상업회의소에서 3년마다 수여하는 이른바 '기업인의 노벨상'인 국제기업인상을 아시아 기업인 최초로 수상했다. 1989년 에세이집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펴내 6개월만에 100만부를 돌파하며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1990년대엔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대우를 성장시켰다.
대우는 1998년말에는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고 해외고용 인력은 15만2000명을 기록했다. 이 당시 대우의 수출규모는 한국 총 수출액의 약 14%에 달하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연간 해외 체류기간이 280일을 넘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1997년 11월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세계경영 신화 몰락의 시작이었다.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 갈등과 마찰을 빚으면서 붕괴가 빨라졌다. 특히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집중 부각했지만, 관료들과의 갈등은 여전했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맞았다.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지면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아울러 일본계 증권사의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가 나온 것을 계기로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1999년 해체 직전 대우는 41개 계열사와 600여개의 해외법인·지사망, 국내 10만명, 해외 25만명의 고용인력을 토대로 해외 21개 전략국가에서 현지화 기반을 닦고 있었다. 당시 자산총액은 76조7000억원, 매출은 91조원(1998년)에 달했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결국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그룹 해체 이후 김 전 회장은 2010년부터 동남아에서 '글로벌 청년 사업가(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양성사업에 매진하며 명예회복에 나섰다. 그 결과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 4개국에 1000여명의 청년사업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고인은 2014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통해 대우그룹의 해체는 경제관료들의 정치적 판단 오류 때문이라는 '기획 해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고인은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뒤 1년여간 투병 생활을 하다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