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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과 인조, 누가 조선을 청나라에 넘겼나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3.11.30 11:46
수정 2013.11.30 12:11

<굿소사이어티 서평>광해군 옹호 한명기와 인조 옹호 오항녕 둘다 틀렸다

한명기 교수의 '역사평설 병자호란'과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푸른역사/너머북스

"200년 후에는 큰 난리가 나고, 500년 후에는 백성들이 굶어 죽을 것이다."

무학대사의 예언처럼 조선은 200년 후에 임란과 호란을 겪는 최대 위기에 처한다. 대부분의 예언이 틀리지만 인간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적중한 예언을 믿고 싶어 한다. 임란을 겪은 광해군은 풍수를 신봉했다고 한다. 실제 그는 경기도 교하로 천도(遷都)를 하고 싶어했다. 그의 정치리더십은 겨우 풍수에 의지할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천도는 실패했고 그는 실각한다. 그는 실패한 임금이었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는 긍정적으로 부활했다.

지난해 영화 ‘광해’는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 광해의 광해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노무현의 동북아 자주노선과 광해군의 독자외교노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맞물려 광해군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반대로 인조는 외교적 실책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광해군과 인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번 달에 소개하는 한명기 명지대 교수의 '역사평설 병자호란 1,2'(푸른역사)는 광해군 쪽 입장을 대변하는 책이다.

논란 속의 광해군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책의 저자 한명기 교수는 저서 '광해군'(한명기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에서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시종일관 인조에 대해 부정적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은 이 책의 속편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광해군의 긍정적인 평가와 인조의 부정적인 평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야 한다.

광해군! 이름 이혼. 1575년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왕비가 아니라, 후궁(공빈 김 씨)이었다. 총명했지만 왕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선조가 후궁에게 본 아들만 열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17세에 세자가 됐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기 때문이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서 조정을 대표하여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했다. 세자 시절의 광해군에 대해서는 평가가 대체적으로 호의적이다. 문제는 이후이다. 오항녕 교수는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에서 한명기 교수와는 다르게 광해군을 ‘부정적’으로 본다.

광해군을 부정적으로 보는 만큼 인조는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시각으로 본다. 사실 인조는 왕이 될 생각이 없었던 사람이다. “웃고 떠들고 소란을 피워 제대로 통솔되지 않았다” (일사기문) 술에 취한 오합지졸 1500명이 별다른 제재 받음 없이 반정(反正)에 성공한다. 이 중 700명 정도가 제대로 된 군인이었을 뿐이었다. 바로 인조반정이다. 이렇게 쉽게 성공했으니 반정은 역사의 필연이었을까? 반정 참여자들은 당연히 광해군을 사상 최악의 왕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이 질문에 “그는(광해군) 본보기가 될 거울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망칠 위험한 거울” 오항녕 교수는 반정 참여자들과 같은 입장을 같이 한다.

광해군의 업적은 없고 실패만 있다?

한명기 교수를 대표로 광해군에 긍정적인 사람들은 대동법을 흔히 광해군의 최대치적으로 평한다. 그러나 오항녕 교수는 광해군이 정말 대동법을 실시하려 했다면 궁궐공사를 뒤로 미루고 대동법을 먼저 실시해야 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광해군의 대동법 관철 의지에 대해 여러 기록을 들어 의문을 표한다. 오 교수는 대동법을 구현하려 했던 이는 그의 아버지 선조였다고 주장한다. 선조 때부터 진행된 공납제 개혁, 특산물을 내는 세제(稅制) 개혁의 연장이 대동법이었다.

그 공감대가 있었기에 광해군 원년에 대동법이 공론에 힘입어 시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혜청이 설치된 뒤 어떻게 대동법이 광해군 이하 조정 관료들에게 홀대를 받고 흐지부지되었다. 대동법의 폐기는 바로 궁궐 공사와 상관이 있으며 이유는 궁궐 공사는 각 지방의 석재, 목재, 철, 기술자를 동원하는 일, 다시 말하면 공납(貢納)의 확대였기 때문이다. 민생을 돌보았다는 동의보감 편찬도 실제로는 선조가 주도 한 것이고 광해군은 단순하게 계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한다.

그래도 외교는 잘하지 않았나? 한명기 교수를 대표로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보는 측은 명과 청의 중립에서 실용외교를 펼치려는 광해군을 높게 평가한다. 이에 대해 오항녕 교수는 이 주장에 반대입장을 분명히 한다. ‘내치 없는 외교는 무의미하다’는 것이 오 교수의 주장이다. 광해군은 나라의 존망이 달리고 군사들의 목숨이 달린 심하 전투 전후에도 궁궐 공사만 걱정했다고 한다. 남한산성, 강화에 쌓아둔 군량미도 궁궐 공사에 투입하고 수군(水軍)도 궁궐 공사 자재 나르는 데 동원했다고 한다.

외적의 침입은 정말 문제였다면 국방력과 민생을 챙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문제 제기한다.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교서에 두 번째로 거론한 것도 바로 이 토목공사에 대한 것일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파병을 거부한 일로 광해군의 외교 능력으로 높이 평가하지만 오 교수가 보기에는 궁을 짓느라 국력을 집중하니 재원이 없어 파병을 못했다고 비판한다.

임해군의 옥사! 집권 서인세력에게 인정받지 못한 광해군이 자기 형을 이용하여 정권을 흔드는 세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옥사라고 한다. 오항녕은 임해군 옥사가 반역을 꾀해 벌어진 옥사라고 하기에는 그 증거가 미미하기 그지없었다고 본다. 그리고 임해군 문제를 덮기 위해 조정이 명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줬다는 것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광해군의 외교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식의 추악한 이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노력한 15년 vs 잃어버린 15년" 한명기 교수는 광해군의 집권 15년을 자주 외교노선과 민생안정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15년이라고 평가한다. 오항녕 교수는 민생 회복, 사회 통합, 재정 확보, 군비 확충, 문화 발전 등 어느 것 하나 이룬 것은 없는 잃어버린 15년이라고 평가한다.

반정의 명분은 지켜졌는가?

'광해군을 쫓아낸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지켜졌는가' 한명기 교수는 날카롭게 인조반정을 이끈 집권세력에게 반문한다. 오항녕 교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조와 그의 집권세력은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긍정적인 점이 없겠는가? 인조는 집권초기 대동법을 시행하기 위해 재성청(裁省廳, 세금을 줄이는 관청이라는 뜻)을 둔다. 궁궐 공사 중지시키고, 12개 도감(都監, 임시 관청)을 폐지하고, 세금을 탕감한다.

이후 효종, 현종을 거치서 대동법이 확대되고, 이어 양반에게도 호포를 거두는 호포제 논의가 균역법으로 이어지고, 노비를 평민으로 만드는 논의도 영조 때 법제화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한다. 인조의 전쟁책임은 국방과 민생은 도외시 하고 궁궐만 지었던 광해군의 잃어버린 15년에 가장 큰 이유가 있었지 인조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책 '역사평설 병자호란'은 오 교수의 주장들에 대한 한명기 교수의 대답과도 같은 책이다. 책의 시작은 이렇다. 안단이라는 포로가 탈출한다. 1636년 병자호란의 와중에 청군에게 붙잡힌 안단은 포로가 되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간다. 주인을 따라 북경으로 갔던 그는 붙잡힌 지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한다. 천신만고 끝에 의주에 도착한 그를 의주부윤 조성보는 청나라 칙사들에게 넘긴다. “고국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왜 나를 죽을 곳으로 내모느냐”라고 호소하는 안단을 끝내 조국은 외면한다.

인조는 집권 초기 광해군이 부모와 같은 중국 조정의 은혜를 배신한 것을 바로잡고 오랑캐를 정벌하겠다고 장담한다. 명에게 인조는 굴러들어온 복이었다. 명은 후금과 싸울 물자를 달라고 조선을 압박하면서 책봉을 2년간이나 미룬다. "온 나라 식량 절반이 모문룡 휘하에 넘어가고 있다." 후금을 치겠다는 명나라 장군 모문룡에게 조선의 물자를 보내는 것을 본 평안감사 윤훤은 이렇게 통탄한다. 16만냥 가까운 은을 챙겨간 명나라 때문에 재정이 초토화돼 일본 침략을 막기 위한 수군(水軍) 배치까지 중단하자는 건의가 나올 정도였으니 의리를 지키는 것은 아름다우나 대가는 엄청났다. 이런 문제까지 광해군에게 물을 수 있을까?

"서로 싸우던 강국 사이에 끼인 채 자위 능력마저 없던 조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극히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하지만 인조 정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집권 직후에는 논공행상의 난맥상에서 비롯된 이괄의 난 때문에, 반란 진압 뒤에는 오로지 '정권 보위'에 급급하다가 정묘호란을 만났다."(7p)

1626년 정묘호란 때 명나라는 아무 도움도 못되고 인조는 오랑캐를 형님으로 받는 조건으로 화친한다. “개, 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 조선의 척화파 신료들은 외쳤다. 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 된다.” 주화파(主和派) 신료들은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당시의 집권당 신하들은 ‘죽음으로써 나라를 보위하자’는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나 하면서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대책이랄 것도 없었다. 다 망한 명나라가 다시 일어서 청나라를 몰아낼 때까지(몽고군에 맞선 고려처럼) 끝까지 저항하자는 황당한 계획부터, 청나라와 화친을 하자는 둥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대책이었다. 백성은 수십만 명이 죽어 가는데 한가하게 이런 대책이나 세우고 있었다.

결국 집권층이 선택한 대안은 결국 조선 왕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세 번 큰 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치욕의 예가 끝난 후 청 황제 홍타이지는 승전을 자축하는 축하연을 벌였다. 잔치에서 눈치나 보던 비루한 왕은 황제가 도성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허겁지겁 도망을 쳤다.

최소한의 품위도 없이 도망가는 인조가 배에 오르려 하자 주변의 신하들은 배에 먼저 타기 위해 서로 밀치며 아수라장을 연출했는데, 심지어 인조의 어의 즉 임금의 옷을 잡아 끄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청군의 호위 속에 서울로 향하는 길에서 인조를 본 조선의 포로들은 울부짖었다. “왕이시여, 왕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통곡하는 그들을 뒤로 하고 인조는 창경궁으로 들어갔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책임은 누가 졌을까? 오직 백성만이 졌을 뿐이다. 민족을 팔아먹고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한 핵심 정치세력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김자점이 대표적인데, 전쟁 발생 사실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역적인데도 불구하고 인조 말기에 영의정까지 오른다. 김류와 김경징은 자신의 직위를 자기 집안의 식솔과 재산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물론 충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 또한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상우도 등에 남아 있던 광해군 (당시 대북파)의 추종자들은 소를 잡아놓고 잔치를 벌였다. 그것은 무능한 왕에 대한 조롱이었다. 나라가 망한 슬픔보다는 라이벌 당파가 세운 왕이 당하는 고통이 더 즐거웠을 정도로 당쟁은 변질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은 내부로부터 이미 멸망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안단의 비극

한명기는 인조에게 오항녕은 광해군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는다. 조선의 실패를 왕인 광해군과 인조에게만 묻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이다. 둘은 다 실패한 왕이며 조선의 재앙이었을 뿐이다. 시시껄렁한 양비론이 아니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을 읽고 내린 필자의 최종적인 결론이다.

이 책은 매우 잘 써진 책이다. 필자는 한명기 교수의 인조에 대한 비판을 전부터 긍정하는 편이었다. 굳이 말하면 광해군을 긍정했었다. 그러나 인조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 책을 읽고 인조의 실패가 오 교수의 주장처럼 광해군에게 큰 책임이 있었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수긍하게 되었다. 왜? 나라의 백성보다 임금이 더 무능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임란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두 임금이 현명히 노력했다면 다시 재기 할 수 있을 만한 역량이 있었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선조 때만 해도 청나라는 조선에 비하면 나라도 아닌 야만족이었을 뿐이다. 청나라가 주변국 17개국 중 가장 위협적이라고 평가 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대부분의 주변국을 복속시켰지만 복속 시키지 못했던 나라가 조선과 베트남 정도였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은 중원을 흔들 정도의 가능성을 가졌던 나라로 평가 받았다. 적어도 내실 있는 내치와 적절한 외교노선을 병행했다면 역사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광해와 인조의 정치적 실정으로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청나라로 잡혀간 포로 안단이 겪은 30년의 고통은 순전히 안단이 감당해야만 했다. 안단과 조선민중들의 고통은 광해군과 인조의 실정이 만든 시대의 결과물 이었다.

글/고진석 독서컨설턴트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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