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일생 트럼프
입력 2026.04.06 13:06
수정 2026.04.06 13:18
이란 상공에서 격추된 미군 F-15 전투기 탑승자들이 미 특수부대에 의해 구조됐다.ⓒ연합뉴스
미국인의 조종사 트라우마
미국 대통령 선거를 6개월 앞둔 1960년 5월초, 파키스탄에서 출격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첩보기 U-2기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됐다. 탈출한 조종사 프랜시스 게리 파워즈는 소련 당국에 체포됐다.
U-2기는 6만6000피트(1만9800미터)라는, 당시 지대공 미사일로는 닿지 않는 고도에서 비행했고 설사 격추되더라도 워낙 고공이라 기체가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미 CIA는 예상했다. 격추될 경우, 조종사는 자살하도록 극약이 지급됐다.
그러나 CIA의 모든 기대와는 달리 조종사 파워즈가 소련 당국에 체포돼 사실상 간첩 행위를 자백하고, 추락한 U-2 기체에서 간첩 활동의 증거물인 초정밀 촬영장치와 사진 자료까지 그대로 소련 당국의 손에 들어갔다.
당시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은 미국이 거짓말 수렁 속으로 더 깊숙이 빠져들도록 전략적으로 조금씩만 정보를 공개하면서 미국을 압박했다. 마침내 미국이 더 이상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러 소련은 조종사 파워즈가 생존해 있으며 간첩행위를 자백했다고 공개했다. 흐루쇼프 서기장은 이 사건을 최대한 활용했다.
이 즈음 열린 미·소 정상회담에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위협했고 이 사건을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했다.
미국 외교는 노르웨이·파키스탄·튀르키예 등 소련과 국경을 맞댄 동맹국으로부터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소련은 조종사 파워스의 신병을 계속 억류하다가 지난 1960년 11월 대통령선거가 끝난 이후에야 미국에 넘겨주었다.
후에 흐루쇼프 서기장은 자서전에서 이 사건으로 연말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가 100만 표 이상 손해 보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연말 대선의 표 차는 겨우 11만8000표였다. 승자는 민주당의 케네디, 패자는 공화당의 닉슨이었다. (이상 졸저 ‘선거는 이미지다’(2025) pp. 74-75에서 인용.)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U-2 조종사 게리 파워즈가 포로로 잡히지 않았다면 공화당 정권이 교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미국인의 조종사 포로 트라우마는 이때 시작됐다.
미국인의 이란 트라우마
미국인의 이란 트라우마는 그리 뿌리가 깊지는 않다. U-2 사건 20년 후인 1980년, 미국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심각한 사건이 연속으로 벌어졌다.
지난 1979년 11월 초, 테헤란의 미국대사관이 점거당해 미국인 53명이 인질로 잡혔다. 1980년 4월 말 미국은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델타포스를 투입했다. 사막의 모래 폭풍 속에 헬기 2대가 충돌하고 요원 8명이 사망한 채 작전은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 인질들은 1980년 8월에야 풀려났다.
결국 허약한 미국의 상징으로 전락한 민주당의 카터 대통령은 연말 대선에서 재선에 실패하고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가 당선됐다. 정권이 교체된 것이다.
레이건의 1980년 대통령 선거 슬로건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합시다’(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였디. 그렇다. 트럼프의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는 레이건의 대선 슬로건에서 Let’s를 뗀 것이다.
그리고 트럼프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 역시 레이건이다. 트럼프가 미디어에 노출되는 무대 장치를 보면 레이건의 무대 장치를 과장한 것이 대부분이다. 레이건은 여유 있는 미국 상류 보수층의 유머감각을 표현했다면 트럼프는 미국 하류 백인 하류층의 막 돼먹은 정서를 대변하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미군 대령의 전략적 가치
이란으로서는 정말 아까울 것이다. 미국과 협상할 수 있는 결정적 카드를 놓쳤기 때문이다. 미군 당국이 조종사가 아니고 무기통제관이라는 신분만 일찍 흘린 것도 혹시 포로로 잡힐 경우의 가치를 줄이기 위한 조처로 이해한다.
그러나 구출한 직후 대령 계급이 공개됐다.대령이나 되는 고급 장교가 직접 전장에 나간 것도 흔치는 않은 일이라 생각된다.
어쨌든 한국은 좁은 나라에 워낙 장성이 많으니 대령 정도는 우습게 본다. 조그마한 구축함 하나도 대령이 함장이고 공군 전투 비행단장이 모두 준장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대령(colonel)에 대한 존경이나 예우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원래 19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대령은 지역 영주들이 맡는 명예직이었고 20세기 이후 군에서 대령이 맡는 역할도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된다.
미군에서는 최고위 장교로, 공군 대령쯤이면 전략 목표나 작전을 이해하는 범위도 매우 크다. 대령이 어마어마한 역할을 하고 그만큼 존경과 예우를 받는다. 해군의 경우 함재기 80대가 넘는 항공모함의 비행단장이 대령이다. 항공모함 함장도 대개 대령이다.
책상물림 장교의 최전선 투입
세칭 전문가들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떠올리면서 미군의 무기통제관 구출 소식에‘미군 특유’의 동료애 를 들먹거린다. 그러나 구조조정 전문가에 전쟁 경험 없는 트럼프가 그렇게 동료애가 투철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적국에 포로로 잡힌 조종사 1명이 대선의 향배를 바꿀 정도인 미국 유권자의 정서를 이해하면 트럼프가 왜 트럼프가 그렇게 목을 맸는지, 구출 성공 보고를 받을 때까지 얼마나 초조했을지, 또 구출 뒤 얼마나 안도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트럼프가 ‘역사상’ 운운하며 자랑한 것도 이해될 것이다. 그러니 않아도 물가와 경기 악화 등으로 연말 중간 선거 전망이 어두운 트럼프 입장에서 말이다. 어쨌든 트럼프로서는 용궁 갔다 왔다.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니다.
미군이나 유럽군은 고위 장교들, 특히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는 실무 책임자인 참모형 장교들이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최전선 전투를 자원하는 경우가 많다.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 ‘위 워 솔저스’(2002)는 월남전 초기인 1965년 최전선에 투입됐다가 극적으로 구출된 할무어 중령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무어 중령은 당시로서는 최신 전술인 헬기 강습 전술을 수립하는 핵심 브레인이었다. 진 핵크만이 주연을 맡은 ‘배트 21’(1988)은 1972년 미공군의 전자전 전문가 아이실 햄블턴 중령이 적진 한가운데 추락했다가 구출된 실화가 소재다.
햄블턴 중령은 미군의 최고 등급 기밀인 전자전 및 미사일 유도 시스템 전문가로 평생 책상과 조종석에서 전자 장비만 만지던 기술 장교였다. 이번에 구출된 대령도 아마도 본인이 현장을 살펴보고 싶어 자원한 것이라 짐작된다.
옛날 사막의 여우로 알려진 독일의 에르빈 롬멜 원수가 경비행기를 타고 최전선을 순찰한 일화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우리 고급 장교들은 과연 얼마나 최전선에 자원할까? 호르무즈 해협 파견도 겁내는 판인데.
글/ 김구철 금강대 연구교수·전 TV조선 선거방송기획단 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