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잡 쓴 소녀들이 고른 건 매운맛이 아니었다– 불닭이 열지 못한 문, 로제 떡볶이가 두드리다 [김희선의 글로벌 K컬처 이야기㉚]
입력 2026.10.02 13:33
수정 2026.10.02 13:33
얼마 전 이 칼럼에서 떡볶이를 다루며 이렇게 맺은 적이 있습니다. 머지않아 히잡을 쓴 여성들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매운맛에 열광하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라고요. 그 장면을 생각보다 빨리, 그것도 화면 밖에서 마주했습니다.
지난주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MIHAS 2026, 세계 최대 규모의 할랄 박람회로 꼽히는 자리에서였습니다. 제가 1년 가까이 할랄 인증을 함께 준비해 온 파트너 브랜드 신전떡볶이와 1층 로컬관에 부스를 열었습니다. 나흘간 나눌 요량으로, 솔직히는 과하다 싶을 만큼 챙겨 간 시식용 떡볶이 컵 2000개가 사흘 만에 바닥났습니다. 그마저도 아끼고 아껴 버틴 사흘이었습니다.
부스 앞 풍경은 매일 비슷했습니다. 히잡을 쓴 10대와 20대 초반의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몰려와 종이컵을 받아 들고 까르르 웃다가, 어느새 케이팝(K-POP)을 흥얼거렸습니다. 한 번 맛본 아이가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오고, 다음 날 또 다른 친구들과 나타났습니다. 떡볶이가 대화의 핑계가 되고, 대화가 다시 떡볶이를 부르는 순환이었습니다. 그 사흘 동안 1층 로컬관에서 가장 붐빈 곳이 우리 부스였다고 말해도 과장은 아닐 겁니다. 부스를 발견한 한국인 유학생들은 뛸 듯이 반가워했습니다. 시식이 동나 아쉬운 걸음을 돌리려던 그들의 손에 떡볶이 밀키트 양념을 쥐여 주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예언은 절반만 맞았습니다. 히잡을 쓴 소녀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 건 매운맛이 아니었습니다. 기본 떡볶이가 끓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크림 로제가 나올 때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몇 해 전 배달 앱을 타고 한국의 10대들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맛입니다. 서울의 교복 입은 학생들이 방과 후 나눠 먹던 그 주황빛 소스를, 이번에는 쿠알라룸푸르의 소녀들이 같은 표정으로 먹고 있었습니다. 언어도 종교도 옷차림도 다른데, 첫 입에 터지는 탄성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습니다. 세상의 10대 소녀들은 어디서든 로제 떡볶이를 사랑하게 되어 있는 걸까요. 어쩌면 맛에도 세대의 언어라는 것이 있어서, 국경보다 나이가 먼저 통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촬영
사실 이 로제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 없을 뻔했습니다. 크림처럼 우유에서 파생된 원료는 할랄 인증에서도 까다로운 영역에 속합니다. 원료 하나하나의 출처와 가공 공정을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 증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교 인증에 관한 한 한국은 아직 초기 시장이라 대체 원료가 드물고, 원료를 구하는 일조차 쉽지 않습니다. 배합을 고치고 서류를 다시 쓰는 날들이 길게 이어졌고, 로제 맛을 포기하자는 말도 몇 번이고 나왔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를 붙잡은 건 하나의 마음이었습니다. 정말 맛있는, 제대로 된 할랄 로제 떡볶이를 우리가 세상에 선보이자는 마음. 우리가 아는 한 그런 떡볶이는 아직 어디에도 없었고, 그 빈자리가 오히려 우리를 자꾸 일으켜 세웠습니다.
할랄 시장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인증받기 쉬운 제품부터 가져가자고 말합니다. 합리적인 전략이고, 저 역시 여러 기업에 그렇게 조언해 왔습니다. 실제로 할랄 시장에 먼저 닿은 한국 식품은 대개 원료 구성이 단순하거나 대체가 쉬운 품목들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정말 즐겨 먹는 맛, 매장에서 끓여 내고 줄을 서서 사 먹는 그 맛들은 늘 다음 순서로 밀려나곤 했습니다. 다만 이번 현장이 알려준 것은, 비어 있던 자리를 가장 먼저 채우는 쪽이 오히려 가장 어려운 맛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수요는 늘 거기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 수고를 감당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 떡볶이가 '제2의 불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쿠알라룸푸르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서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매운맛을 찍어 올리며 세계로 번진 불닭볶음면이 도전하는 음식이었다면, 친구의 손을 끌고 다시 찾아오게 만드는 로제 떡볶이는 나누는 음식에 가깝습니다. 하나는 화면 너머로 퍼지고, 다른 하나는 식탁 위에서 번집니다. 앞의 확산이 빠르다면 뒤의 확산은 느리지만 깊습니다. 어쩌면 떡볶이는 불닭이 미처 열지 못한 문을 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일은 일일 뿐, 지나친 사명감은 경계하자는 쪽입니다. 마음이 무거워지면 오래 걷기 어려우니까요. 그런데 행사가 끝난 뒤, 부스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모로코 소녀에게서 메시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한국 음식을 자신들도 먹을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이것이 자신에게 큰 의미라고, 언젠가 아랍 세계로 오게 되면 통역을 돕겠다고요. 사명감은 스스로 짊어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때로는 이렇게 고객이 건네주기도 하나 봅니다. 입맛이 통하면 마음도 통합니다. 그 마음을 들고, 다음 도시로 가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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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 Team8 Partners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