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주행 ‘잃어버린 5년’ 끝낸다…“한국형 G3, 대규모 실증에 달렸다” [2026 산업비전포럼]
입력 2026.09.16 13:43
수정 2026.09.16 13:45
하성용 한국자동차모빌리티안전학회장 "기술력만으로 G3 불가능"
미국·중국은 대규모 운행 데이터 축적…한국은 상용화 단계서 뒤처져
"최소 3000대급 실증 필요…골든타임 놓치면 미·중 기술에 종속"
AI 재학습·안전 검증·인증 잇는 국가 플랫폼으로 자율주행 G3 도약
하성용 한국모빌리티안전학회 회장이 16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데일리안 2026 경제산업포럼'에서 '상용 플릿 데이터와 안전이 만드는 자율주행 G3'를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테슬라 차량 수만 대가 국내 도로를 달리며 데이터를 쌓는 동안 우리는 100대, 200대 규모의 실증에 머물고 있습니다.”
한국 자율주행 산업이 미국과 중국에 뒤처진 ‘잃어버린 5년’을 끝내려면 대규모 실증을 통한 상용화 자산 확보에 나서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기술 개발에만 머무르지 않고 최소 3000대 이상의 자율주행차를 실제 도로에 투입해 데이터를 축적하면 한국도 자율주행 세계 3강인 ‘G3’에 진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성용 한국자동차모빌리티안전학회장은 16일 ‘상용 플릿 데이터와 안전이 만드는 자율주행 G3’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한국은 자율주행 기술 수준에서 세계 4위권에 올라 있지만 상용화와 산업화 측면에서는 상당히 부족하다”며 “한국형 G3 전략의 출발점은 3000대급 상용 플릿 구축”이라고 밝혔다.
한국이 미국의 인공지능(AI) 안전 기술, 중국의 규모와 속도, 유럽의 표준·인증 역량을 결합한 독자적인 추격 전략을 세우면 아직 승산이 있다는 게 하 회장의 진단이다. 국내 자동차 제조 역량과 반도체·통신·시험평가 기술을 실제 운행 데이터 및 안전 입증 체계와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 회장은 지난 5년을 한국 자율주행 산업의 ‘잃어버린 시간’으로 평가했다. 정부는 2019년부터 약 1조500억원을 투입해 세계 최고 수준의 자율주행 기술 확보를 추진했지만 그사이 미국과 중국은 기술 개발을 넘어 실제 서비스와 대규모 데이터 축적 단계로 나아갔다.
그는 “당시 세계 2위 수준을 목표로 했지만 결과적으로 중국이 미국과 함께 자율주행 산업을 주도하는 위치까지 올라갔다”며 “한국은 기술을 보유하고도 이를 서비스와 시장 경쟁력으로 바꿀 상용화 자산을 충분히 만들지 못했다”고 말했다.
실제 기술 수준과 상용화 경쟁력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벌어져 있다. 하 회장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2025년 미국의 자율주행 기술 수준을 100으로 봤을 때 한국은 89.2, 중국은 92.4였다. 최근 평가에서는 중국이 98.5까지 올라온 것으로 나타났다.
하 회장은 “10%포인트(p) 정도의 기술 격차는 숫자로 보면 작아 보이지만 첨단기술 분야에서는 하늘과 땅 차이일 수 있다”면서도 “한국이 기술과 상용화를 동시에 확보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면 추격은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하성용 한국모빌리티안전학회 회장이 16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데일리안 2026 경제산업포럼'에서 '상용 플릿 데이터와 안전이 만드는 자율주행 G3'를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추격의 핵심은 실제 도로를 달리는 차량에서 나오는 데이터다. 웨이모는 미국 주요 도시에서 로보택시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고 중국 기업들도 정부 지원과 거대한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대규모 자율주행차 운행에 나서고 있다. 실제 도로에서 발생하는 돌발 상황과 사고 위험을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소프트웨어에 반영하는 순환 구조를 구축한 것이다.
국내를 달리는 테슬라 차량도 사실상 움직이는 데이터 수집망 역할을 하고 있다. 카메라와 센서를 통해 확보한 국내 도로의 다양한 주행 데이터를 자율주행 기술 고도화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 회장은 “테슬라 차량 수만 대가 이미 대한민국 도로를 운행하며 데이터를 쌓고 있다”며 “국내에서는 100대, 200대 규모로 실증하는 동안 데이터 격차가 계속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국내 실증 사업이 속도를 높이려면 차량 수와 운행 범위를 동시에 확대해야 할 것으로 봤다. 서울 등 대도시부터 부산 항만 물류, 세종, 농어촌까지 서로 다른 도로와 운행 환경에서 데이터를 확보하고, 실증 규모도 3000대를 시작으로 향후 1만대 이상까지 확대해야 미국·중국과의 상용화 격차를 좁힐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 회장은 이를 위한 ‘국가 자율주행 데이터 스페이스’ 구축을 제안했다. 데이터를 쌓아두는 저장소가 아니라 실제 운행 데이터를 AI가 다시 학습하고 가상환경에서 검증한 뒤 인증과 안전성 평가까지 이어지는 국가 플랫폼이다.
그는 “데이터 전략의 핵심은 기업에 무조건 데이터를 공유하라는 것이 아니다”며 “실제 운행 데이터를 안전하게 통제하고 기업과 연구기관이 재사용할 수 있도록 검증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의 복잡한 도로 환경과 운전 문화도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돌발 상황과 변수가 많은 국내 도로에서 충분한 데이터를 확보하면 다양한 위험 상황을 검증할 수 있는 세계적인 자율주행 시험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축적한 주행 시나리오와 안전 입증 체계는 향후 해외에 수출할 수 있는 산업 자산이 될 수 있다.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시대에 맞춘 인증제도 개편도 과제로 꼽았다. 차량 소프트웨어는 무선 업데이트만으로 주행거리나 자율주행 기능이 달라질 수 있지만 현재 인증제도는 출고 당시의 하드웨어 성능을 확인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 회장은 “기존 인증 방식만으로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차량 성능을 관리하기 어렵다”며 “한 번 시험하고 끝내는 인증이 아니라 업데이트 이후에도 안전성을 지속적으로 입증하는 증거 체계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무조건적인 규제 완화에는 선을 그었다. 단순히 규제를 완화하는 단계를 넘어 규제의 안전망 안에서 기업이 실증과 상용화를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 ‘안전한 패스트트랙’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규모 실증을 통해 확보한 안전 자료를 제도와 인증 기준에 반영하고 이를 다시 상용화로 연결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궁극적으로는 한국이 자율주행 안전기준과 국제표준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동차와 반도체, 통신 분야의 제조 경쟁력을 바탕으로 데이터 수집과 AI 재학습, 안전 검증, 인증, 국제표준을 하나의 생태계로 묶으면 후발주자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하 회장은 “미국의 AI 안전 기술과 중국의 규모·속도, 유럽의 표준·인증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전략이 한국에 필요하다”며 “자율주행 G3는 한두 개 기업의 힘만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상용화 자산을 만들지 못하면 보유한 기술을 시장 경쟁력으로 전환할 수 없다”며 “국가가 대규모 실증과 데이터, 검증, 인증, 표준화를 연결하는 운영체계를 구축한다면 한국도 기술 4위에서 G3로 도약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