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장을 차면 민주주의도 달라지는가 [정상환의 시대읽기]
입력 2026.09.03 07:00
수정 2026.09.03 07:00
"이름표, 살아온 삶의 결과인가, 도구인가"
"말을 비판할 순 있어도 못하게 해선 안 돼"
"검사는 악, 특별검사는 선인가"
"다수 의석은 권한이지 모든 것의 면허증 아냐"
3월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청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가 설치돼 있다. ⓒ뉴시스
대학 시절 야학 선생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야학에는 수년간 청춘을 바쳐 묵묵히 학생들을 가르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크게 내세우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반면 일주일에 한 번 겨우 나와 1년도 채우지 않고 떠난 어떤 선생은 훗날 출판기념회 책자에서 당시의 부조리에 저항하며 야학 활동에 모든 것을 바친 사람처럼 자신의 경력을 부풀려 놓았다. 그리고 그는 정치인이 되었다.
그 과포장의 씁쓸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또 한 친구가 있다.
80년대 시위 대열 근처에서 전경차에 글자 몇 자를 적다 붙잡혀 며칠간 구류를 살았다. 졸업 후에는 공무원이 됐다. 훗날 그 암울했던 시절의 며칠 구류가 민주화운동의 경력이 됐다. 평생을 써먹는 자칭 민주투사가 됐다.
그 사람 때문에 민주화가 된 것 같았다.
세상 참…
야학에 나온 것은 사실이다. 전경차에 글자를 쓴 것도, 며칠 구류를 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의 일부가 곧 그 사람의 전체 이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의 작은 조각에 의미를 덧붙이고 크기를 부풀리면 전혀 다른 이력이 만들어진다.
사람은 거짓말로만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다. 때로는 사실을 과포장한다.
아주 오래전 읽었던 이야기도 하나 떠오른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아마 이청준의 「자서전들 쓰십시다」였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출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시골의 한 머슴이 읍내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는다. 사진사는 그럴듯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양복을 입히고 영어책 한 권을 손에 쥐여준다. 사진 속의 그는 영락없는 지식인이다.
그런데 하필 그 책이 일제 경찰이 불온하게 여기던 책이었다. 사진을 본 경찰은 그를 붙잡아 옥살이를 시킨다.
해방이 되자 이야기는 다른 쪽으로 흘렀다.
그 옥살이는 항일투사의 경력으로 덧칠된다. 알량한 사진 한 장에 시대의 해석을 덧씌워 열혈 애국지사의 이력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이력은 출세를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된다.
사진 한 장이 사람을 바꾼 것이 아니다.
시대가 그 사진에 새로운 이름표를 붙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에게는 이름표가 붙는다.
야학 교사, 민주화운동가, 검사, 언론인, 정치인...
그런데 그 이름표가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결과가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갈아 끼운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신념이 이름표를 만든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이름표를 갈아 낀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도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검찰을 악마로 성토하는 전직 검사 출신 국회의원.
그의 이름표는 '검사'인가, '검찰개혁론자'인가. 어느 쪽이 진짜인가.
군사독재 시절, 거리에 최루탄이 난무할 때 그 독재정부의 관료가 되기 위해 밤을 새우던 고시생.
오늘날 그가 내세우는 '민주'라는 이름표와 당시의 모습 중 어느 것이 본모습인가.
불평등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사교육 시장의 큰손이 된 운동권 인사.
그가 경멸하던 자본주의와 그가 누리는 자본주의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인가.
정론직필을 외치던 언론인이 진영의 선전수로 변한 경우도 있다.
그때의 '정론직필'과 지금의 '진영 논리' 중 어느 것이 그의 본모습인가.
법과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의 삶에는 법적 논란과 전과가 따라붙는 정치인도 있다.
법치를 말하는 그의 이름표와 실제 삶 중 어느 것이 진짜인가.
물론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생각을 바꾸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과거의 신념을 반성하고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온 삶으로 이름표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순간마다 과거의 한 조각을 꺼내 자신에게 유리한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니다.
기회주의적 과포장이다.
더구나 이들은 대개 그렇게 갈아 낀 이름표를 민주화의 훈장으로, 개혁의 경력으로, 도덕적 우월감의 근거로 앞세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훈장으로 완장을 꿰찬다.
윤흥길의 소설 '완장'이 떠오르는 이유다.
저수지 관리원에게 주어진 것은 저수지를 관리할 권한이었다. 하지만 완장을 차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권한을 마을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지배의 권력으로 착각한다.
완장은 권한의 표시였지만, 그에게는 지배의 면허증이 되었다.
오늘 우리 정치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본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세력이 가장 강하게 외쳤던 것 가운데 하나는 사상의 자유와 말할 권리였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말하는 사람의 입을 막으려 한다.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존중하는 것과, 그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말할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말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말도 못하게 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말만 자유롭게 하는 제도가 아니다. 내가 듣기 싫은 말까지 어디까지 견딜 것인가를 시험하는 제도다.
과거 국가 사정기관의 정치적 이용을 비판하며 '정권 보위용 칼춤'이라고 했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은 뒤에는 특별검사를 앞세운다. 수사가 필요한가 아닌가의 문제와 별개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검사는 악이지만 '특별한 검사'는 선인가?
수사의 원칙이 달라진 것인가. 권력이 달라진 것인가.
야당일 때 의회민주주의와 견제를 외치던 사람들이 거대 의석을 얻은 뒤에는 의석수를 앞세운다.
다수 의석이 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일지는 몰라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면허증은 아니다.
선거는 권력을 맡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맡긴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숫자로 이기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다수는 소수를 인정하고, 힘이 있어도 절차를 지키며, 필요하면 타협해야 한다.
그때 맞서 싸운 것은 권력의 횡포였는가.
아니면 그저 그 권력이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인가.
완장은 권한을 준다.
그러나 완장이 사람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완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그 사람을 드러낸다.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국민의 주인이 아니다.
잠시 국민이 완장을 채워준 것뿐이다.
권력은 언젠가 다시 국민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권력자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완장이 아니다.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보다,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를 아는 절제다
세월이 지나면 사진은 빛이 바래고 이름표도 낡는다.
과포장된 이력도 언젠가는 벗겨진다.
그때 남는 것은 이름표가 아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다.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완장을 차자 가면을 벗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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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상환 환경국립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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