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김초엽부터 천선란·단요·이현까지…원작 장르 맞춤형 무대화 활발
하반기 소설 원작 창작 초연 잇달아
낭독극·AI 영상·뮤지컬 등 극장 고유의 현장성 극대화
최근 국내 공연계에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과 뮤지컬 제작이 단순한 줄거리 전달 방식을 벗어나고 있다. 원작의 인지도에 기대 서사를 무대 위에 압축 나열하는 방식이 아닌, 원작 소설이 지닌 핵심 소재와 시공간 설정을 무대에 맞춰 재구성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활자 텍스트를 무대 세트, 첨단 영상 기술, 배우의 발화 방식, 음악 등 구체적인 공연 문법으로 전환해 현장성을 극대화하는 형태다.
원작의 특성을 살린 연출 방식은 순수문학과 SF 장르의 무대화에서 뚜렷하게 대비된다.
오는 10월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를 통해 국내 초연되는 연극 ‘새’Oiseau)는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1부를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줄리 델리케가 연출을 맡아 지난 7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세계 초연됐다. 이 작품은 대규모 세트나 사실적 묘사를 배제하고, 무대 위 두 배우의 낭독과 절제된 호흡을 중심으로 극을 전개한다. 활자 속에 담긴 역사적 비극과 인물의 내면을 배우의 신체와 음성이라는 최소한의 무대 언어로 집약해 전달하는 방식이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낭독공연 '새' ⓒ아비뇽페스티벌
반면, 김초엽 작가의 동명 SF 단편을 원작으로 한 연극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기술적 장치를 전면에 배치했다. 포항문화재단과 극단 길이 제작해 9월 포항문화예술회관 초연 후 ‘2026 리:바운드 축제' 일환으로 11월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 오른다. 이 작품은 AI 영상, 미디어아트, 이머시브 입체 음향 기술을 도입했다. 우주정거장과 웜홀 등 SF적 시공간 배경을 시각·청각적 기술로 구현하는 동시에, 100년에 걸친 인물의 기다림을 무대 장치와 결합해 표현한다.
SF 소설의 무대화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진 행보를 보이는 작가는 천선란이다. 앞서 ‘천 개의 파랑’이 뮤지컬과 연극으로 각각 제작된 데 이어, 올해는 장편소설 원작 연극 ‘뼈의 기록’이 무대에 올랐다. 인간의 마지막 기억을 수습하는 안드로이드 장의사라는 설정을 절제된 무대 연출과 조명 디자인으로 풀어내며 기계의 시선으로 바라본 죽음과 기억의 문제를 정제된 연기로 다뤘다.
연극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뮤지컬 '이끼숲' 포스터 ⓒ포항문화재단, 라이브커넥션
이어 천 작가의 또 다른 대표 SF 소설을 원작으로 한 창작 초연 뮤지컬 ‘이끼숲’도 10월 1일부터 12월 13일까지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공연된다. 지상이 멸망한 후 지하 도시로 추방되어 통제된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연대와 성장을 다룬 작품으로, 디스토피아 지하 도시의 서사를 음악과 무대 언어로 입체화한다.
이 밖에도 다양한 장르의 소설들이 각기 최적화된 무대 문법을 찾아가고 있다. 단요 작가의 SF 소설을 무대화한 창작 뮤지컬 ‘다이브’는 기후 재앙으로 침수된 2057년 서울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설정을 음악과 무대 장치로 전환했다. 수중 세계와 기계인간이라는 SF 요소를 뮤지컬 넘버와 역동적인 무대 전환을 통해 대중적 공연 양식으로 재해석했다.
100만 부 이상 판매된 이현 작가의 베스트셀러 동화를 원작으로 한 ‘푸른 사자 와니니’는 가족 뮤지컬 형식을 취했다. 광활한 아프리카 초원과 야생 동물 캐릭터의 생동감을 군무와 앙상블 넘버, 역동적인 무대 세트로 구현하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신작으로 첫선을 보였다.
이들 초연작의 공통점은 원작 소설의 텍스트를 무대라는 제한된 시공간에 맞게 적극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과거 소설 원작 공연이 텍스트의 줄거리를 충실히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최근 작품들은 텍스트의 설정을 극대화할 수 있는 연출 형식을 선택해 무대화하고 있다.
한 공연 관계자는 “원작의 대중적 인지도에만 기대지 않고, 문학과 공연 예술이 각자의 표현 방식을 결합해 무대 완성도를 높이려는 시도”라며 “소설 원작이 공연계의 안전한 흥행 수단을 넘어 새로운 무대 기술과 연출 형식을 실험하는 창작 기반이 된 셈”이라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