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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배수진 – 탄금대 전투 [정명섭의 실록 읽기㊷]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8.18 14:01
수정 2026.08.18 14:01

왜군, 전국 시대 실전 경험과 조총 보유

조선군, 실전 경험 부족에 지휘관 숙련도도 떨어져

임진왜란이 터진 지 불과 사흘 만에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함락되었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일본군을 막을 방파제가 필요했다. 선조는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던 신립을 삼도 순변사에 임명했다. 신립은 여진족 니탕개의 평정한 무인이자 기마전의 달인이었다. 선조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은 그가 나선다면 왜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채 열흘도 가지 못했다. 서기 1592년 4월 28일, 신립이 이끈 조선군은 충주의 탄금대에서 전멸했다.


휘하의 병사들을 모두 잃은 신립은 부장인 김여물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가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몸을 던졌다. 사실은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일단 신립이 지휘하게 된 병력은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조정이 내준 군사는 8천 명 안팎이었는데, 그나마 제대로 훈련된 정예병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전투가 벌어지기 며칠 전에 합류했다. 병사들의 기량을 파악하기는커녕, 얼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충주 탄금대에 있는 충혼탑 / 출처 : 직접 촬영


충주에 도착한 그는 문경새재를 방어선으로 삼자는 참모들의 건의를 받았다. 새재는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좁은 고갯길을 거점으로 삼으면 소수의 병력으로도 대군을 막을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특히, 충주목사 이종장과 조령 방어를 건의한 종사관 김여물은 새재에서 버텨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신립은 그들의 의견을 거절했다. 그리고 새재 대신 탄금대를 전장으로 삼았다. 그가 새재 대신 탄금대를 선택한 이유는 지금도 논란이 된다. 훈련되지 않은 오합지졸을 험한 산악에 세워봤자 지형을 활용하기는커녕 도주만 쉬워질 뿐이라는 판단햇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처럼 무전기와 통신장치가 없던 시절이라 병사들을 흩어놓으면 제대로 통제가 안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기마전이 특기인 자신에게는 넓은 평야가 유리하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탄금대 앞 들판은 기병을 운용하기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강을 등지고 배수진을 친 것은 병사들의 퇴로를 막아 결사 항전을 이끌어내기 위한 결단이었다고도 한다.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28일에는 신립이 배수진을 친 탄금대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중의 적이 호각 소리를 세 번 발하자 일시에 나와서 공격하니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며,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신립이 도로 진을 친 곳으로 달려갔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


일본군은 빠르게 진격해서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성을 공격해서 점령해 버렸다. 탄금대에 주둔한 신립은 당황해서 성으로 돌아갔다가 일본군의 반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일본군의 조총과 실전 경험 앞에 속수무책으로 패배한 것이다. 신립은 기병대를 돌격을 해서 일본군의 진영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여진족과의 전투에서도 그런 식으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군은 여진족이 아니었고, 조총을 가지고 이었다. 일제히 쏟아지는 조총에 말과 사람이 함께 쓰러졌다. 버틸 공간도 퇴각할 방향도 없었다. 전열이 무너진 조선군은 남한강으로 내몰렸다. 신립 본인도 끝까지 싸우다 강에 뛰어들었다. 그의 나이 마흔여덟이었다. 종사관 김여물도 함께 전사했다. 지휘관이 전사하자 남은 병력은 사실상 와해 되었다. 충주에서 신립 장군이 패전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한양으로 전해졌고, 조정을 공포에 빠트렸다. 충주가 돌파되면 그 다음은 한양이었기 때문이다.


신립의 패배를 두고 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새재를 버린 것이 결정적 실수였다는 시각이 많다. 실록도 그렇고 지원군을 이끌고 온 명나라의 이여송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군도 그 점을 인정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문경새재를 포기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선택으로 남았다. 하지만 신립이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통해 엄청난 실전을 경험했으며, 명나라 해적 왕직을 통해서 들여온 서양의 조총을 보유했다. 반면, 조선은 건국 이후, 커다란 전쟁을 겪지 않으면서 실전 경험이 부족했고, 지휘관의 숙련도가 떨어졌다. 실제로 조선의 정규군은 임진왜란 초반 해유령 전투를 제외하고는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탄금대에 올라서 남한강을 내려다 본 적이 있다. 너무나 평화로워서 수백 년 전,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신립의 패배는 조선이 오랫동안 간직해 온 평화가 깨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탄금대에서 남한강으로 몸을 던진 신립은 자신의 패배로 인해 조선이 멸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조선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 의주까지 밀려났지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승리와 의병들의 활약으로 반격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정명섭 작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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