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계 대신 판을”…무대 위 원로·중견 배우들이 보여준 ‘진짜 어른’의 자격
입력 2026.08.13 08:34
수정 2026.08.13 08:34
차인표·신구·박근형… 후배들의 디딤돌이 된 배우들
차인표 “20대의 엄혹한 환경은 기성세대 책임”
일방적 훈육 아닌 선택지를 제시하는 무대
연극 무대가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 간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기성세대의 훈계나 조언이 이른바 ‘꼰대 담론’으로 치부되며 거부당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무대 위 배우들은 지시나 오만한 가르침 대신 ‘부채감’을 고백하고 후배들에게 실질적인 기회의 장을 열어주는 방식으로 대안을 제시한다.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존 키팅 선생 역을 맡은 배우 차인표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최근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로 첫 무대 도전에 나선 배우 차인표의 행보가 대표적이다. 그는 극 중 존 키팅 선생을 연기하며 정답을 강요하는 스승이 아닌, 청년들의 방황을 함께 고민하고 조력하는 인물을 그려낸다.
차인표는 “지금의 20대가 살아가는 엄혹한 환경은 결국 기성세대가 만든 것”이라며 기성세대로서의 미안함과 책임감을 고백했다. 훈계를 늘어놓기보다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 열매를 나누는 것이 진짜 어른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이는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 등에서 보여준 사적 제재 및 단죄 서사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미디어가 폭력과 즉각적인 단죄를 통해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동안, 현실은 ‘꼰대 담론’에 막혀 어른이 정당한 조언조차 건네기 힘든 구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차인표는 일방적인 단죄나 정답을 강요하는 대신, 청년들 앞에 다양한 삶의 선택지가 존재함을 짚어주는 방식을 취한다. 특히 그는 소외계층 청년들의 문화관람을 돕는 한편, 사비로 영화 제작진과 캐스팅 관계자들을 연극 현장에 직접 초청하고 있다. 무대 위에서 열정을 쏟지만 매체 진출이나 생계 유지의 기회가 부족한 청년 배우들의 진로를 모색해주기 위함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집착하기보다 후배 배우들이 주목받을 수 있도록 무대 안팎에서 공간을 내어주는 태도는, ‘지시하는 어른’이 아닌 ‘실질적인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보여준다.
원로 배우 박근형(왼쪽)과 신구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이러한 흐름은 한국 연극계를 지탱해 온 원로 배우 신구와 박근형의 행보와도 궤를 같이한다. 이 같은 고민은 무대 위 선배들이 걸어온 길과도 맞닿아 있다. 차인표는 현장에서 신구, 박근형 등 대학로를 지키며 후배들에게 판을 열어준 원로 배우들의 행보를 언급하며, 기성세대 배우로서 무대 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공감과 존경을 표했다.
신구와 박근형은 단순히 이름값으로 관객을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청년 배우들과 대등하게 호흡하며 출연료 출연 및 기금 조성을 통해 소극장 연극 제작과 청년 배우들의 생계 및 무대 지속성을 지원하는 실질적인 ‘판’을 만들어왔다. 특히 지난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기부공연을 계기로 청년·신진 연극인을 지원하는 ‘연극내일기금’ 조성에 힘을 보탰다. 올해 7월 11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베니스의 상인’ 기부공연의 티켓 수익과 현장 기부금 역시 청년 연극인의 훈련과 창작, 공연 제작 등을 지원하는 데 쓰이도록 했다.
박근형은 ‘베니스의 상인’ 기자간담회 당시 “‘고도를 기다리며’의 성공적인 공연 이후 형님(신구)과 함께 ‘우리가 받은 걸 어떻게 되돌려 줄 수 있느냐’ 이야기했고, 제작사에 부탁해 일부 회차를 기부 공연으로 전환해 ‘연극 내일 프로젝트’가 시작됐다”고 밝혔다.
이어 “생활고에 시달리는 젊은 청년에게 학교보다 더 빠른 길로 갈 수 있는 (연기) 교육 기관을 만들어주고 싶었다”며 “저희는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신체 훈련을 능수능란하게 해내고 발음이나, 우리나라의 국어 (공부)를 제대로 해내는 걸 보고 끝까지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봤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희는 후원을 하고 잘 이끌어져 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전했다. 잔소리나 가르침 대신, 후배들이 제대로 훈련받고 무대에 설 수 있는 토대를 직접 구축해 준 셈이다.
가르치고 훈계하는 어른의 언어는 사실상 효용을 잃었다. 메시지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일방적인 지시와 강요는 세대 간의 간극을 넓힐 뿐이다.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 속 차인표, 그리고 오랜 기간 무대를 지켜온 신구·박근형의 실천은 현시대에 필요한 어른의 품격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