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기아 유럽 공략 ‘첩첩산중’…이번엔 車 설계까지 규제
입력 2026.08.10 07:00
수정 2026.08.10 07:00
재생 플라스틱 의무화…설계부터 폐차까지 관리
'재활용 가능한 車' 넘어 '재활용 소재로 만든 車' 요구
현대모비스·협력사까지 공급망 재편 불가피
中 전기차 공세 속 가격·점유율 경쟁도 부담
위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유럽연합(EU)이 자동차 규제를 탄소배출에서 차량 설계와 소재, 폐차까지 아우르는 '순환경제'로 확대하면서 현대자동차와 기아의 유럽 시장 공략이 한층 까다로워질 전망이다. 전기차 판매를 늘려 탄소 규제를 충족하는 동시에 재활용 소재를 확보하고 부품사까지 연결된 공급망 관리체계를 새로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 전기차 업체와의 가격·점유율 경쟁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규제 대응 비용까지 추가되는 셈이다.
10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EU는 최근 '차량 설계의 순환성 및 폐자동차 관리 규정(Regulation 2026/1738)'을 최종 확정했다. 지난달 24일 EU 관보에 게재된 이 규정은 이달 13일 발효된다. 기존 폐자동차 지침과 차량 재사용·재활용 관련 지침을 하나의 규정으로 통합해 단계적으로 적용한다.
이번 규제의 핵심은 EU가 자동차를 바라보는 기준을 '폐차할 때 얼마나 재활용할 수 있느냐'에서 '처음 만들 때부터 얼마나 순환 경제에 맞게 만들었느냐'로 확대한 데 있다.
기존에도 EU는 승용차가 중량 기준 최소 85% 이상 재사용·재활용되고 95% 이상 재사용·회수될 수 있도록 요구해왔다. 새 규정에서도 이 기준은 유지되나, 앞으로는 완성차 업체가 공급망 전체에서 차량에 들어가는 소재의 종류와 중량 정보를 수집하고, 협력사로부터 받은 정보의 정확성과 완전성을 검증하는 절차까지 갖추도록 했다.
없던 규제도 새로 생겼다. 2032년 9월 이후 형식승인을 받는 신차는 차량에 사용되는 플라스틱 중 최소 15%를 소비 후 폐기물에서 나온 재생 플라스틱으로 사용해야 한다. 2036년 9월부터는 비율이 25%로 높아진다.
여기에 목표량의 최소 20%는 폐자동차 또는 차량 사용 과정에서 제거된 부품에서 회수한 플라스틱으로 채워야 한다. 다른 산업에서 나온 폐플라스틱을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동차→폐차→재활용→자동차'로 이어지는 폐쇄형 순환 공급망을 구축하라는 의미다.
차량 설계 기준도 까다로워진다. 2032년부터 전기차 배터리와 배터리팩, 전기 구동모터 등을 차량에서 쉽게 제거하고 교체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 폐차 후 재사용이나 재활용, 재제조가 필요한 일부 부품 역시 분리가 어렵지 않은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
차량 한 대에 들어가는 소재와 부품 정보를 추적하는 '디지털 순환성 차량 여권'도 2032년 9월 도입된다. 완성차 업체뿐 아니라 협력사도 부품과 소재를 정해진 기준에 따라 식별·관리해야 한다.
적용 시점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은 아니지만, 기업 차원의 대응은 이보다 먼저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 업체들에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완성차 제조사는 2029년 9월부터 순환성 전략을 수립해 EU 집행위원회와 각국 형식승인 당국에 제출하고 5년마다 이를 업데이트해야 한다. EU는 해당 내용을 공개할 예정이다.
현대차가 올 하반기 유럽시장에 출시하는 현지 전략형 모델 '아이오닉 3' ⓒ현대자동차
현대차·기아 입장에서는 기존 배출가스 규제에 이어 또 다른 과제를 맞닥뜨리게됐다. EU는 지난해부터 승용차의 전체 평균 CO₂ 배출 목표를 2020~2024년보다 15% 낮췄으며, 강화된 규제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유럽에서 전기차 판매 비중을 지속적으로 높여야 하는 상황이다.
이는 앞으로 전기차를 많이 판매하는 것만으로는 규제를 충족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전기차를 더 많이 파는 것'과 '자동차를 만드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것'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가장 큰 숙제는 공급망이다. 자동차용 플라스틱은 내열성과 강도, 충격흡수 성능 등 품질 기준이 까다로워 일반 재생 플라스틱으로 쉽게 대체하기 어렵다. 폐자동차에서 나온 플라스틱까지 일정 비율 사용해야 하는 만큼 유럽 현지에서 안정적인 폐차·회수·재활용망을 확보할 필요성도 커졌다.
현대차·기아만 바꾼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현대모비스를 비롯한 계열 부품사와 소재업체, 수많은 협력사가 차량에 들어가는 소재의 종류와 중량, 재활용 원료 사용량 등을 추적할 수 있는 체계를 함께 구축해야 한다. 폐차업체와 재활용업체까지 연결하면 사실상 자동차 공급망 전체를 순환경제 체제로 재편해야 하는 셈이다.
이미 폐배터리 재활용과 친환경 소재 확대, 폐플라스틱 활용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EU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이를 공급망 전체에 적용하려면 추가적인 투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기아의 유럽 최대 경쟁자인 중국 업체들도 같은 규제를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BYD는 헝가리에 유럽 승용차 생산거점을 구축하고 있고, 체리 역시 스페인을 생산 거점으로 활용하는 등 현지화에 나선 상황이다. 중국 배터리 업체들도 유럽 현지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업체들의 저가 공세에 점유율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새로운 순환경제 규제까지 더해지면서 현대차와 기아의 유럽 전략은 한층 복잡해질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가격과 성능을 넘어 누가 더 빠르게 현지 공급망을 구축하고 규제 비용을 낮추느냐의 경쟁으로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EU 자동차 규제는 이제 탄소배출을 줄이는 수준을 넘어 자동차 생산부터 폐차까지 전 생애주기를 관리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전기차 판매 확대와 동시에 공급망 재편, 재활용 소재 확보, 디지털 관리체계 구축까지 함께 추진해야 하는 만큼 유럽 시장 공략이 이전보다 훨씬 까다로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