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미 트로피 내던지고 지킨 정체성…BTS가 증명한 ‘브랜드 주권’ [이슈]
입력 2026.08.01 09:59
수정 2026.08.01 10:01
'베스트 아시안 팝' 신설에 보이콧으로 응수
"음악, 지역이나 언어 아닌 그 자체로 사랑받길"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구분되기보다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지난 7월 29일, 그룹 방탄소년단(BTS) 멤버들이 SNS에 동시에 올린 이 짧은 한 문장은 미국 대중음악계에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레코딩 아카데미가 제69회 그래미 어워즈를 앞두고 ‘베스트 아시안 팝’ 부문을 신설하자, 방탄소년단은 정규 5집 ‘아리랑’을 포함한 신곡을 출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표면적으로는 아시아 음악을 우대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방탄소년단과 같은 아시아 아티스트를 주요 본상(올해의 앨범, 올해의 레코드 등)에서 떼어놓으려는 ‘구분 짓기’의 의도를 짚어낸 판단이었다.
방탄소년단 월드투어 '아리랑' 부산 ⓒ빅히트뮤직
이번 결정은 개별 아티스트와 특정 시상식 간의 단편적 갈등에 그치지 않는다. 그간 비서구권 음악계에서 그래미 어워즈가 성공을 가늠하는 최고의 잣대로 작동했다면, 이제는 아티스트가 레거시 미디어의 인정을 구하기보다 자신의 정체성과 메시지를 중심에 두고 ‘브랜드 주권’을 행사하는 양상으로 재편되고 있다.
사실 그래미의 보수성과 인종·장르적 편향성에 대한 팝스타들의 거부감은 수년 전부터 누적되어 온 구조적 문제다. 2021년 위켄드는 글로벌 히트곡 ‘블라인딩 라이트’(Blinding Lights)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단 한 개 부문에도 후보로 지명되지 못하면서 그래미 영구 보이콧을 선언했다. 에미넴, 드레이크, 프랭크 오션 등 굵직한 아티스트들 역시 “그래미가 비백인·비서구권 아티스트를 시청률 확보 수단으로만 소비한다”며 불참을 이어왔다.
시청률 폭락과 비난에 직면한 그래미가 후보 선정용 ‘비밀 위원회’를 폐지하는 등 뒤늦은 개혁안을 내놓았으나, 이번 ‘베스트 아시안 팝’ 신설에서 보듯 비서구권 음악을 주류 무대 외곽에 격리하려는 속성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거대 시상식이나 음악 자본이 설정한 틀에 종속되기를 거부하고 아티스트가 주도권을 확보하는 흐름은 최근 팝 시장 전반에서 포착된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데뷔 초기 발표한 앨범들의 마스터 권한(녹음 원본 소유권)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사모펀드 등에 매각되자, 직접 작사·작곡한 권리를 활용해 1~6집 앨범 전곡을 똑같이 다시 녹음해 발표했다. 대중과 팬덤은 자본이 소유한 구버전 대신 아티스트의 소신이 담긴 재녹음 음원을 소비함으로써 응답했다. 거대 음원 자본의 통제력보다 아티스트가 지닌 고유의 브랜드 가치가 시장에서 더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입증한 대목이다.
방탄소년단의 그래미 보이콧 역시 이러한 맥락 위에 서 있다. 비서구권 음악을 주류 카테고리 바깥으로 격리하려는 시스템에 맞춰 승인을 구하는 대신, 출품 포기를 통해 음악적 자존감과 정체성을 지키는 선택을 내린 것이다.
이러한 글로벌 아티스트들의 행보는 시상식과 아티스트 간의 권력관계가 역전되었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방탄소년단은 빌보드 메인 차트 정상과 스타디움 규모의 월드 투어를 통해 외부 시상식의 인증 없이도 글로벌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확립했다. 이에 따라 그래미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쪽은 아티스트가 아니라, 대중적 영향력과 시청률 유지를 위해 글로벌 아티스트의 참여가 필요한 시상식 측이 됐다.
그동안 미국 메이저 시상식 입성이 케이팝의 글로벌 확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지표 중 하나로 소비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 최정상의 아티스트가 시상식의 구조적 한계를 직접 지적하며 그 틀에서 벗어남으로써, 케이팝 산업이 서구 권력의 승인에 연연할 이유가 없음을 다시금 확인시켰다. 언어와 국경의 한계를 넘어 음악 자체로 소통하겠다는 소신은, 외부 기구가 부여하는 상징적 훈장보다 훨씬 더 강력한 아티스트의 자산으로 남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