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의 기적 [조남대의 은퇴일기(104)]
입력 2026.07.28 16:58
수정 2026.07.28 16:59
비어 있던 방에 온기가 든다. 정적만 감돌던 잔디밭에 낯익은 웃음소리가 층층이 쌓이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라오스의 뜨거운 볕을 온몸에 두르고 건너온 딸네 식구들이 양평의 작은 농원을 찾았다. 기다림 끝에 마주한 재회는 찰나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부터 시간은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흐르는 듯했다. 8일간의 짧은 소란이 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가슴 저릿한 이별의 예감이기도 했고, 뜻밖의 사진 한 장에 담긴 기적 같은 안도감이기도 했다.
ⓒ정적만이 감도는 양평 농원
라오스의 뜨거운 볕 아래서 살던 네 명의 딸 식구가 양평 농원의 품에 둥지를 틀었다. 정적 속에 머물던 산골은 철새 떼가 날아든 듯 단숨에 북적였다. 아침이면 손주들의 고사리손을 잡고 텃밭으로 향했다. 상추와 고추 모종을 심고 조심스레 물을 주는 아이들의 눈망울엔 생명의 경이로움이 맺혀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적막하던 농원은 노래와 춤으로 다시 깨어났다. 천진난만한 외침 뒤섞인 소란함은 우리 부부에게 세상의 어떤 교향곡보다 달콤한 음악이었다. 어느덧 여드레가 지나 시간은 야속하게도 이별의 문턱 앞에 우리를 세워두었다. 서울역 승차장까지 옮겨다 준 짐은 무려 열세 개나 되었다. 커다란 캐리어부터 손주들의 이불과 베개를 넣은 조그만 배낭에 옷 가방까지, 줄지어 서 있는 짐들을 보며 그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삿짐을 방불케 하는 짐 꾸러미들을 보니, 저 무거운 것을 들고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자식의 뒷모습이 안쓰러워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손주들의 노래와 장난으로 북적이는 양평 농원
서울역 플랫폼의 공기는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부산함으로 가득 찼다. 잠시 숨을 돌리며 "이 많은 짐이 너희와 쌓은 추억이다"라는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가운데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떠나는 이들의 긴장과 보내는 이의 아쉬움이 교차하는 순간을 붙들어 두고 싶어 휴대폰을 들었다. 셔터 소리와 함께 사진을 공유하고, 멀어지는 기차를 향해 한참 동안 손을 흔들었다. 양평으로 돌아오는 차 안의 공기는 납덩어리처럼 무거웠다. 아내는 차마 터뜨리지 못한 울음을 삼키려는 듯 내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8일간 꽉 차 있던 온기가 한순간에 빠져나간 자리에는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의 허기가 들어차 있었을 것이다. ‘올 때 반갑고 갈 때는 더 반갑다’라던 호사가들의 우스갯소리는 자식을 다시 먼 타국으로 보내야 하는 우리에게는 당치 않은 소리였다. 집에 돌아와 난장판이 된 거실을 정리하고, 흩어진 손주들의 체취를 빗자루로 쓸어 담고 나자 농원은 예전의 고요를 되찾았다. 멍하니 앉아 멀리 보이는 백운봉을 바라보았다. 지난 여드레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곁에 선 아내의 눈시울이 여전히 붉어 애잔함이 더해진다.
ⓒ서울역 플랫폼에서 짐과 가방을 앞에 놓고 기념 촬영하는 딸네 가족
이별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이었다. 대구 시댁에 도착한 딸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안부 인사가 아니라 비명에 가까운 다급함이었다. 가방 하나가 감쪽같이 증발했다는 것이다. 안에는 사위의 업무용 정장 두 벌과 중요한 서류가 들어 있단다. 가족 단체 대화방은 순식간에 비상 연락망으로 변했다. 점심을 먹었던 서울역 식당부터 분실물센터까지 수소문했으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아내는 서울역 대기실이나 식당에 흘린 것은 아닌지 안절부절못하며 서울역으로 달려가 보라며 나를 채근했다. 조금 전까지 감돌던 쓸쓸한 정서는 간데없고 집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진 속 사위 손에 들려 있는 옷 가방
그때, 기적 같은 단서가 나타났다. 딸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가 찍어 올린 마지막 사진을 확대해 본 것이다. 열세 개의 짐 더미 속에서 사위 왼손에 문제의 양복 가방이 선명하게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아빠, 옷 가방이 사진 속에 있어요, 기차 탈 때 들고 있었어요" 사진은 정직하게 증명해 주었다. 그 한 장의 사진은 모든 불필요한 추측을 종결시켰다. 가방은 주인과 함께 기차에 올랐으나, 내릴 때는 어느 구석진 곳에 홀로 남겨졌던 모양이다. 미아가 된 가방은 종착역인 포항까지 홀로 여행한 것이었다. 무심히 찍은 사진 한 장이 사위의 양복을 찾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혼란과 걱정으로 얼룩질 뻔한 우리 집에 평온을 되돌려주었다.
ⓒ동대구역으로 가는 열차 편에 옷 가방을 실어 주는 포항역 유실물센터 직원
포항역 유실물센터 직원의 전화 목소리는 따뜻했다. 가방은 주인을 기다리며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 친절하게도 직원은 당일 저녁 동대구역으로 가는 열차 편에 가방을 실어 보내주겠다고 했다. 철도원들의 세심한 배려가 사고로 끝날 뻔한 이별의 마침표를 안도의 사건으로 바꾸어 놓았다. 딸은 "아빠의 사진 한 장이 다 해결했어요. 정말 감사해요"라며 특별히 인사를 전해 왔다. 아비로서 그저 가족의 뒷모습을 남기고 싶어 우연히 포착한 찰나의 기록이 뜻밖의 실마리가 되어 자식의 곤란함을 해결해 준 셈이다.
ⓒ무사히 옷 가방을 받았다는 소식에 안심하는 부부
다음 날 아침, 역에 가서 양복을 무사히 찾아왔다는 문자를 받고서야 우리 부부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날 셔터를 누른 것은 어떻게든 함께할 시간을 1초라도 더 붙잡아두고 싶었던, 아비의 미련이자, 다 전하지 못한 사랑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무심히 남긴 사진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었고, 자식을 걱정하며 밤잠을 설치던 부모의 마음마저 다독여주었다. 농원은 다시 본연의 침묵 속으로 침잠했다. 하지만 내 휴대폰 속 사진 한 장에는 여전히 열세 개의 가방과 그것을 지키며 서 있던 가족의 포근했던 봄날이 화석처럼 박제되어 있다.
ⓒ손녀가 손자를 안고 환하게 웃는 모습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버리기도, 찾기도 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뜻밖의 기록이 우리가 놓친 것들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던 손주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하다. 잃어버린 가방을 되찾던 순간의 기쁨과 그 환한 미소는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
조남대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