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한 점 없이 서울 온 러시아 에르미타주…‘전시’ 수출하는 박물관 [이슈]
입력 2026.07.28 10:53
수정 2026.07.28 10:56
고가의 원화 대여 대신 소장품·해설·공간을 콘텐츠로…유튜브와의 차별점은 키워야
러시아 국립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명작들이 서울에 왔다. 하지만 실제 그림과 조각은 한 점도 없다. 대신 소장품 이미지와 연구 자료, 겨울궁전의 역사를 영상과 음향, 해설로 재구성한 전시가 원화를 대신했다.
디지털 특별전 ‘찬란한 에르미타주’ 현장.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27일 전시 주최사 아트웍스에 따르면 4월 30일부터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리고 있는 디지털 특별전 ‘찬란한 에르미타주’는 오는 30일 막을 내린다.
지난 25일 전시장에는 입장 시간마다 20명 안팎의 관람객이 들어갔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동안에도 가족과 친구 단위 방문객들이 계속 도착했다.
전시는 실물의 30분의 1 크기로 제작한 겨울궁전 외벽 모형에서 시작됐다. 러시아 클래식 음악과 함께 빛과 영상이 궁전 외벽을 채웠다. 이어 요르단 계단과 문장 홀, 1812년 전쟁 화랑, 라파엘 회랑 등 겨울궁전의 주요 공간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화재와 복원 과정, 황실 행사와 각 공간의 쓰임을 한국어로 해설했다. 다음 전시장에서는 렘브란트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클로드 모네, 앙리 마티스 등의 작품을 대형 화면과 홀로그램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이택광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국내에서 미디어 전시가 성장한 배경을 기술의 발전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봤다.
이 교수는 “해외 대형 박물관과 비교하면 국내 박물관은 보유 유물의 양이나 교류 조건에서 상대적으로 약점이 있고, 진품을 들여오려면 상당한 비용이 든다”며 “이런 조건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한 여러 실험을 해왔고, 비용 대비 효과가 확인되면서 하나의 전시 방식으로 안착했다”고 말했다.
국내 미술계가 새로운 미디어에 익숙하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국내에서는 1970년대부터 비디오아트가 시도됐고, 백남준은 영상과 위성방송, 설치를 결합하며 세계 비디오아트의 흐름을 이끌었다. 1988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설치된 ‘다다익선’은 1003대의 모니터를 쌓아 만든 대표작이다.
박물관을 이용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24년부터 관람객이 유물을 의상과 분장으로 재해석하는 ‘국중박 분장놀이’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참가자들이 SNS에서 화제를 모으자 올해는 국립중앙박물관과 13개 소속관이 참여하는 전국 행사로 확대했다.
특별전에서 볼 수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 외형(왼쪽)과 내부 전시 모습.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이 교수는 “한국에서 박물관과 미술관은 대중이 여가를 보내는 장소가 됐다”며 “관객이 단순히 유물을 감상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직접 참여하도록 여러 실험을 했고, 이런 방식이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고 설명했다.
원화 없는 명화전도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2014년 용산 전쟁기념관의 ‘반 고흐: 10년의 기록전’은 작품 300여 점의 이미지를 프로젝터 70여 대로 펼쳤다. 2016년 문화역서울284의 ‘반 고흐 인사이드: 빛과 음악의 축제’는 약 400점의 인상파 작품에 3차원 프로젝션 매핑과 가상·증강현실을 더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대형 영상·음악 전시 방식은 2018년 제주 ‘빛의 벙커’를 통해 국내에 들어왔다.
이후에는 박물관이 제작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했다. 2019년 서울에서 열린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는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이 직접 제작했고, 2024년 인천 뮤지엄엘의 ‘모나리자 이머시브’는 루브르 박물관의 고해상도 이미지와 큐레이터의 연구를 바탕으로 구성됐다. 이번 에르미타주 전시는 소장품뿐 아니라 겨울궁전의 역사와 공간까지 해외에 내보낸 사례다.
한국은 이러한 전시를 들여오는 데서 나아가 해외로 내보내고 있다. 디지털 디자인 기업 디스트릭트는 2020년 제주에서 시작한 ‘아르떼뮤지엄’을 청두와 홍콩, 라스베이거스, 두바이, 뉴욕 등으로 확대했다.
원화를 옮기지 않으면 대여와 운송 부담을 줄이고 한 번 제작한 전시를 여러 도시에서 선보일 수 있다. 그러나 원본의 질감과 크기를 직접 확인할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찬란한 에르미타주’ 전시 현장에서 만난 관람객 A씨는 “러시아 클래식 음악과 함께 보여주는 연출은 좋았다”면서도 “대형 구조물과 관객 사이가 좁아 화면 전체를 한눈에 담기 어려웠고, 가격만 놓고 보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영상만 보여주는 전시라면 요즘처럼 유튜브가 발달한 시대에 굳이 전시장까지 가서 볼 이유가 없다”며 “여행 유튜버가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을 대신 보여주는 것과 비슷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