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온기로 품어주는 '선희이모' [쇼트 시네마(167)]
입력 2026.07.23 08:38
수정 2026.07.23 08:38
위은경·손광민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선희이모' 스틸컷ⓒ
애견미용사 선희(정호정 분)는 어느 날 한 여자로부터 강아지 메주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손님은 메주를 "아름답게 해달라"는 말만 남긴 채 사라지고, 선희는 메주의 양쪽 귀를 노랗게 물들여준다. 밤이 깊도록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선희는 메주를 집으로 데려와 돌보기 시작한다.
혼자 사는 선희의 일상은 소박하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건강 영상을 챙겨보며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10년 만에 조카 서연(위은경 분)이 찾아온다. 다음 날 뉴질랜드로 떠나기 전 이모를 보고 싶어 왔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대충 식사를 해결하던 선희는 서연을 위해 정성껏 밥상을 차려낸다. 대화를 나누던 중 선희는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동생의 안부를 묻고, 서연은 엄마가 죽었다고 말한다. 사실 서연은 어린 시절 엄마에게 버려져 선희의 손에서 자란 아이였지만, 이후 떠난 뒤 10년 동안 이모와도 연락을 끊고 살아왔다.
서연의 캐리어를 본 선희는 허술한 짐에 마음이 쓰인다. 마트에 데려가 상비약과 생필품, 반찬까지 하나하나 챙겨 캐리어를 가득 채워준다. 이후 서연의 외국인 남자친구 다미와 영상통화를 하던 중, 선희는 서연이 엄마가 죽었다고 거짓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연은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선희는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며, 엄마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간다고 몰아세운다. 이에 서연은 자신을 엄마와 엮지 말라며 울분을 터뜨리고, 자신이 견뎌온 지난 10년의 시간을 이해해 달라고 맞선다.
감정이 격해진 서연은 짐을 챙겨 집을 나서려 하고, 그 순간 열린 문 사이로 메주가 밖으로 뛰쳐나간다. 두 사람은 함께 메주를 찾아 나서고, 담벼락 위에서 술에 취한 여인과 마주친다. 그녀는 메주의 주인이었고, 오늘 밤 메주와 함께 죽으려 했다고 털어놓는다. 선희는 주인을 찾았으니 메주를 돌려줘야 한다고 하지만, 서연은 그런 사람에게 메주를 보낼 수 없다며 뛰어가 메주를 품에 안고 돌아온다. 선희 역시 결국 아무 말 없이 함께 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돌아온 서연은 헤어디자이너답게 오랫동안 손질하지 못한 이모의 머리를 노랗게 염색해준다. 염색약이 스며드는 시간을 함께 보내며 두 사람은 조금씩 마음을 연다. 선희는 서연에게 "언제든 다시 이 집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말하고, 서연은 그 말 속에서 변함없이 자신을 기다려준 이모의 사랑을 느낀다.
다음 날, 선희는 진수성찬을 차려 마지막 식사를 함께한 뒤 서연을 떠나보낸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찾아오고, 선희는 메주와 함께 장을 보고 평범한 일상을 이어간다. 서연은 곁에 없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있다는 사실을 남긴 채, 선희는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 삶을 이어간다.
영화 '선희이모'는 친엄마의 사랑에 결핍을 겪은 서연이 그 빈자리를 이모의 온기로 채워나가는 과정과 오랫동안 서로뿐이었던 두 사람의 묵직한 관계성을 다룬다. 이야기 속에서 강아지 메주와 선희이모의 관계는 곧 이모와 서연의 관계를 기막히게 비유하는 영리한 연출로 기능한다. 주인이 찾아가지 않는 강아지를 보며 무심하게 던진 이모의 "또 키우라고?"라는 대사는 상처와 책임감, 그 복잡한 굴레를 또다시 짊어져야 하는 선희이모의 지난 세월이 겹쳐진다. 그럼에도 끝내 강아지를 품에 안고 돌아오는 서연의 선택은 이모와의 관계 회복을 암시한다. 동시에 과거 이모가 어린 서연을 버리지 않고 거두어 키워냈듯 서연 역시 불행한 주인의 손에 방치될 위기에 처한 메주를 버리지 않는 쪽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상징적으로 쓰인 노란색 역시 두 인물의 서사를 촘촘하게 연결한다. 선희이모의 얼룩덜룩해진 노란색 염색 머리와 서연의 노란 브릿지, 그리고 메주의 귀에 입혀진 노란 염색은 모두 하나의 온기로 묶여 있음을 보여주는데, 서연의 머리색 또한 먼 옛날 선희이모의 손으로 직접 물들여졌을 과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배우 정호정이 연기한 선희이모의 푹 눌러쓴 생활감과 위은경 배우가 직접 서연으로 분해 손광민 감독과 함께 연출해 낸 극의 분위기는 하이퍼리얼리즘에 가까운 생생함과 압도적인 인물 간의 케미스트리를 완성해 낸다.
영화는 부모조차 버린 아이를 기꺼이 품어내고 또다시 새로운 생명을 끌어안으며 삶을 이어가는 선희이모의 강인한 애정, 그리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순환하는 사랑의 힘을 담담하게 전한다. 러닝타임 24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