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탄진에 펼쳐진 영화의 한 장면, 단편영화의 새로운 거점 '씬탄' [공간을 기억하다]
입력 2026.06.06 11:11
수정 2026.06.06 11:11
[작은영화관 탐방기㊱]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상업영화가 주지 못하는 날카로운 시선, '일상적인 시장'을 위한 도전
어떤 공간은 단순히 머무는 장소를 넘어 사람과 이야기를 연결한다. 대전 대덕구 신탄진에 위치한 씬탄(Scene.tan)이 그렇다. 대전청년영상커뮤니티 잉크(INK)의 오랜 고민과 에너지가 응축돼 탄생한 이곳은 영화의 기본 단위인 '씬'(Scene)과 지역명 신탄진의 '탄'(tan)을 더한 이름처럼, 이곳은 지역에 새로운 문화적 장면을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낮에는 커피 향이 흐르는 여유로운 쉼터가 되고, 밤에는 단편영화를 통해 창작자와 관객이 만나는 스크린이 된다. 지역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작품들을 소개하고, 영화를 매개로 새로운 관계와 영감을 만들어가는 씬탄은 극장과 카페, 문화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풍경을 완성해가고 있다.
황근하 대표는 지난 6년 간 영상 제작 워크숍을 운영하고 지역 영상제를 기획, 진행하며 만들어진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 안타깝고 영화가 상영된 이후의 삶이 너무 짧다는 이유에서 씬탄의 문을 열었다.
"수많은 창작자가 피땀 흘려 만든 좋은 단편영화들이 영화제라는 짧은 축제가 끝나면 관객과 만날 기회를 잃고 컴퓨터 하드디스크 속에 갇히게 됩니다. 창작자들에게는 지속해서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안정적인 플랫폼이 필요했고, 관객들에게는 대형 멀티플렉스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시선을 만날 수 있는 일상적인 통로가 필요했습니다. '영화제가 끝난 뒤에도 언제든 찾아가 영화를 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아지트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갈증이 상영관 설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편영화의 사후 생명력을 연장하고 창작자와 관객이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것이 씬탄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황 대표의 고민은 상영관의 형태에만 머물지 않았다. 어떤 지역에서, 누구와 함께 이 공간을 만들어갈 것인가도 중요한 과제였다. 그는 문화적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신탄진에서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신탄진은 교통의 요충지이자 오랜 역사를 지닌 동네이지만, 상대적으로 문화 예술 인프라는 부족해 청년층이나 문화 소비자들이 즐길 만한 콘텐츠가 많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이 점을 오히려 기회로 보았습니다. 이미 문화적으로 포화된 중심가가 아니라, 오히려 문화적 갈증이 있는 곳에서 시작해야 공간의 존재 이유가 더 선명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신탄진이 가진 특유의 로컬 정서와 아날로그적인 매력은 독립·단편영화가 가진 날것의 매력과 닮아 있습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로컬 문화를 활성화하고, 대전 중심부나 타 지역 사람들도 '씬탄의 영화를 보기 위해 신탄진을 찾게 만드는' 흐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중심지가 아닌 곳에서 발견한 가능성, 그리고 지역의 문화적 갈증을 채우겠다는 포부는 공간을 채울 콘텐츠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탄진이라는 공간에 담아내고자 한 콘텐츠는 다름 아닌 단편영화다. 상업 영화가 주지 못하는 단편영화만의 매력은 이 공간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단편영화는 창작자의 가장 날카로운 시선과 순수한 실험정신이 가장 밀도 있게 담기는 그릇입니다. 상업적 흥행 부담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화두나 개인의 깊은 내면을 과감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10분에서 30분 남짓한 짧은 상영 시간 덕분에 바쁜 현대인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고, 한 번에 여러 편의 다양한 시선을 경험할 수 있다는 강력한 매력이 있습니다. 상업 영화가 주지 못하는 신선한 충격과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단편영화만 한 콘텐츠는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단편영화가 처한 이 차가운 현실은 씬탄이라는 공간이 왜 세상에 나와야 했는지를 증명하는 이유기도 하다. 영화제가 끝난 뒤에도 작품이 관객과 만나고, 창작자가 자신의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영의 기회와 접점을 늘리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부재'입니다. 현재 단편영화는 공공 지원금이나 영화제 스크리닝 페이에 극도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창작자가 영화를 만들어도 관객과 만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유통·상영 구조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악순환이 반복되다 보니 많은 재능 있는 감독과 배우들이 지속적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고 현장을 떠나게 됩니다. 단편영화도 엄연히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로서 소비되고 대가를 받는 '일상적인 시장'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그 최소한의 보루가 될 상설/비상설 공간들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
지역과 글로벌을 잇는 실험, '전국적인 영화 성지'를 꿈꾸다
단편영화라는 날카롭고 순수한 렌즈를 통해 지역과 사람을 연결하겠다는 포부는 이제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다양한 실험을 준비 중인 이 공간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미래는,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시너지에 있다.
"씬탄은 영화를 감상하는 '극장'의 기능을 넘어, 문화를 매개로 사람이 모이는 살롱이자 크리에이티브 플레이그라운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곳에서는 단순히 불이 꺼지고 켜지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밖에서 더 많은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영화를 본 뒤 낯선 이들과 감상을 나누고, 창작자와 밤새 토론하며, 나아가 나만의 콘텐츠를 구상하는 공간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문화적 소외감을 해소하는 지역의 자랑거리이자, 전국 창작자들이 한 번쯤 머물다 가고 싶어 하는 '로컬 문화의 거점'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단순히 작품을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구조에서는 창작자와 관객 모두 깊은 유대감을 느끼기 어렵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건강한 관계망을 구축하기 위해, 공간이 설계한 교류의 방향성은 명확하다.
"기존의 GV(관객과의 대화)가 무대 위 창작자와 객석의 관객이라는 수직적 구조였다면, 씬탄이 지향하는 교류는 수평적이고 친밀한 네트워킹입니다.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 운영하는 '심야극장'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영화가 끝난 뒤 함께 음료를 마시며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서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까지 편안하게 공유하는 모습을 꿈꿉니다. 관객은 창작자의 팬이 되어 지지를 보내고, 창작자는 관객의 생생한 피드백을 통해 다음 작품을 만들 에너지를 얻는, 건강한 '문화적 연대'가 이곳에서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어요."
씬탄은 영화를 매개로 창작자와 관객을 연결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미 진행하고 있으며, 향후에는 교육과 국제 교류, 지역 연계 프로젝트까지 활동 범위를 확대할 예정이다.
"이미 시도하고 있거나 준비 중인 프로젝트들이 많습니다. 다양한 창작 워크숍을 실제로 운영하고 있고 차후 기획중인 프로젝트로는 씬탄을 창작의 베이스캠프로 삼아 마을을 무대로 영화를 만드는 창작 여행 프로그램인 '영활' 프로젝트를 고도화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화와 시를 페어링하는 시;네마라는 프로그램도 운영 예정이며, 다양한 시네클럽도 운영 예정입니다. 또한 국내 지역 감독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일본 독립영화계 등 해외 네트워킹을 활용해 글로벌 단편영화를 로컬 관객에게 소개하고 교류하는 국제 교류 상영회도 정기적으로 개최할 계획입니다. 더불어, AI 기술을 접목한 영상 제작 워크숍 등 대중이 직접 창작자로 거듭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도 지속해서 확장해 나갈 예정입니다."
씬탄이 꿈꾸는 미래는 단순히 상영관의 규모를 키우는 데 있지 않다. 지역에서 시작된 문화적 연결이 더 많은 창작자와 관객을 만나고, 또 다른 지역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드는 데 있다. 단편영화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내는 공간. 씬탄은 그 긴 여정을 신탄진에서 계속 써 내려가고 있다.
"5년 뒤에는 '지역단편영화를 즐기려면 대전 신탄진의 씬탄으로 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전국적인 '지역단편영화의 성지'가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지역 창작자들의 좋은 작품이 씬탄을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지고 유통되는 상징적인 플랫폼이 되었으면 합니다. 10년 뒤에는 씬탄의 모델이 하나의 성공적인 로컬 비즈니스이자 문화적 대안으로 인정받아, 제2, 제3의 씬탄이 전국 다른 지역 소도시에도 뿌리내리는 마중물이 되기를 꿈꿉니다. 그때가 되어도 변함없이, 신탄진 골목길에서 따뜻한 불을 밝힌 채 누군가의 인생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 공간으로 든든하게 서 있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