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석과 번수의 난 – 탐라의 두 번째 반란 [정명섭의 실패한 쿠테타 역사㊱]
입력 2026.05.26 14:01
수정 2026.05.26 14:01
고려 조정이 경주 별초군과 이비, 패좌의 반란으로 정신이 없던 신종 5년인 서기 1202년 10월, 지금의 제주도인 탐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보고를 받은 조정은 소부소윤 장윤문과 중랑장 이당적에게 진압하라는 임무를 주고 파견한다. 장윤문은 탐라현령을 지낸 적이 있어서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인물이었고, 중랑장 이당적은 아마 무력으로 진압할 임무를 맡은 것 같다. 중랑장은 고려시대 종5품의 무관직으로 중앙군인 2군 6위의 장군 바로 아래 직책으로 오늘날의 연대장급인 대령에 해당된다. 탐라는 독자적인 왕국이었다가 약 100여년 전에 고려가 탐라현을 설치하면서 고려의 영토가 된다. 하지만 탐라에는 성주와 왕자라는 지역 기반의 유력 호족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탐라 백성들은 양쪽의 지배를 받는 셈이었다. 거기다 새로 지배자가 된 고려에서 파견한 관리들은 탐라에서 한몫 챙길 생각 밖에는 하지 않았다.
제주목관아 ⓒ직접 촬영
그래서 의종 22년인 서기 1168년에 양수가 주동한 반란이 일어났는데 고려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선정을 베푼 최척경을 다시 현령으로 부임시켜 달라는 소박한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고려 조정이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자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면서 첫 번째 반란을 막을 내린다. 하지만 최척경 이후의 탐라 현령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럽거나 혹은 무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종 16년인 서기 1186년 7월에 누군가 조정에 탐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고한다. 놀란 조정에서 서둘러 안무사를 파견한다. 하지만 거짓 고변이었고, 탐라는 조용했다. 중요한 건 조정에서 탐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믿었다는 것이다. 아마 탐라 주민들의 불만이 크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기 1202년 진짜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을 일으킨 것은 번석과 번수였는데 특별한 직책이 없었고, 이름으로 봐서는 평범한 주민으로 보인다. 반란이 일어난 이유는 따로 나와있지 않지만 관리들의 수탈과 괴롭힘 때문으로 추정된다. 거기다 신라의 도읍이었던 동경에서 신라 부흥을 내건 반란들이 연이어 일어난 시기와 겹친 것을 보면 혹시나 고려 조정을 몰아내고 탐라의 독립을 외치는 반란이었을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34년 전에 일어난 양수의 반란과는 달리 무척 거세고 완강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착한 현령을 보내달라는 정도의 요구조건이 아닌 훨씬 과격한 목적의 반란이었고, 고려 조정에서도 별다른 회유 없이 강경 진압으로 나선 이유도 그것 때문으로 보인다. 진압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방식으로 토벌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동경에서의 반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던 그해 연말, 탐라로 파견된 장윤문과 이당적의 보고가 올라온다.
탐라안무사 장윤문과 이당적이 보고하기를, 반적의 우두머리인 번석(煩石)과 번수(煩守) 등 모두를 처형하였다고 하였다.
실제로는 두 사람만 죽었을 리는 없고, 많은 탐라 주민들이 토벌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재산을 잃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탐라는 섬이라는 특성상 육지의 군대가 상륙에 성공해서 교두보를 확보하면 도로 밀어내기가 굉장히 어렵다. 진압군의 병력과 물자는 육지에서 가져올 수 있는 반면, 작은 섬인 탐라에서 동원할 수 있는 물자와 병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탐라의 주민들 모두가 번석과 번수의 반란에 동조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기존의 지배세력인 성주와 왕자 세력들 역시 거리를 두고 지켜봤을 것이다. 그러다가 번석과 번수가 이끄는 반란군이 수세에 처했을 때 진압군에 가담해서 힘을 보탰을 수 도 있다. 어쨌든 탐라에서의 반란은 이런 식으로 평정되기가 반복되어서 삼별초의 난과 목호들의 반란에서도 같은 패턴으로 진행된다. 아마 고려 조정의 실권자 최충헌은 좀처럼 진압되지 않아 골치를 아프게 하는 경상도의 반란군들과는 달리 두 달 만에 탐라의 반란을 평정했다는 사실을 기뻐했을 것이다. 번수와 번석의 반란은 당시 고려를 뒤흔든 수 많은 반란 중에 하나로 남았다. 관련 기록도 두 번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탐라에서의 두 번째 반란은 마지막 반란이 아니었다.
반란은 진압군의 창칼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지만 불만을 품은 탐라 주민들의 마음까지 억누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과 친지들의 시신 앞에서 불만을 말하지는 못했지만 입 밖으로 말하지 못한 불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쌓여갔다. 반란이 마무리된 이후에 고려 조정에서 파견한 탐라 현령들은 여전히 주민들을 수탈하고 괴롭혔다. 육지에서 온 이들에 대한 탐라 주민들의 불만은 세월이 지나갈수록 뜨거워졌고, 결국 삼별초가 들어오자 이들과 함께 고려 조정에 대항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정명섭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