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도라’ 정주리 감독, 프로이트 실패작을 뒤집다…“기어이 일어설 다음 세대를 향해” [칸 리포트]

데일리안(프랑스, 칸) =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5.20 05:40
수정 2026.05.20 18:47

정주리 감독 세 번째 장편작

장편 데뷔작 '도희야'(2014)로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두 번째 장편 '다음 소희'(2022)로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초청되며 전 세계 평단의 찬사를 받았던 정주리 감독이 마침내 세 번째 신작으로 돌아왔다. 제79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공식 초청되며 다시 한번 프리미어 무대를 밟은 그의 신작은 영화 '도라'다.



ⓒSusyLagrange-SD

'도라'는 서울을 떠나 한여름 바닷가 별장으로 향한 한 가족의 풍경을 비추며 시작된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원인 모를 알 수 없는 병을 앓던 소녀 도라가 생애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낯선 감정을 알게 되면서, 고요했던 가족의 일상과 모든 관계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매혹적이고도 밀도 높게 그려낸 작품이다.


세 작품 연속 칸의 선택을 받으며 명실상부한 '칸이 사랑하는 연출가'로 자리매김한 그였지만, 전 세계 영화인들 앞에 새로운 세계를 처음으로 꺼내 보이는 순간만큼은 긴장감과 떨림을 감출 수가 없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칸의 뜨거운 환호 속에서 전 세계 최초로 베일을 벗은 '도라'의 상영이 끝나자 객석에서는 일제히 뜨거운 박수갈채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마침내 관객들의 진심 어린 반응을 마주한 정주리 감독은 비로소 긴장이 풀린 듯 환한 미소와 함께 첫 공개의 벅찬 소회를 전했다.


"관객들 앞에서 상영을 했는데 긴장을 많이 했어요. 그날의 느낌은 영화를 끝까지 잘 봐주셨구나 싶었죠. 만드느라 힘들었으나 용기가 나는 그런 경험이었습니다."


영화 '도라'는 백 년도 더 된 정신분석학의 고전을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과감하게 비튼 작품이다. 이 사례는 프로이트가 히스테리 증상을 앓던 18세 소녀를 상담한 실제 기록이다. 당시 프로이트는 소녀의 억압된 성적 욕망을 밝혀내려 했지만, 도라가 그의 일방적인 진단에 반발해 치료를 중단하면서 이 연구는 프로이트의 대표적인 실패작이자 오만했던 남성 중심적 시선의 한계로 역사에 남았다. 정신분석학의 거장 프로이트가 남긴 실패한 기록을 왜 지금, 정 감독은 이곳의 이야기로 다시 불러내야 했을까.


"어렸을 때 읽고 마음에 남아있는 사례였습니다. 꼭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했어요. 프로이트 '도라' 사례가 실패했잖아요. 그것도 흥미로웠어요. 결국에 끝까지 파악 못했구나 싶어 다시 돌아봤을 때 그의 방식으로 쓰여진 이야기를 다시 뒤집어봐야겠다 싶었죠. 뒤집어보니 도라가 살아난 것 같은 경험을 했어요. 이런 전복의 경험을 영화적으로 잘 구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만들면서 지금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어야 하는게 가장 중요했어요. 두 가족만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한국 사회의 분위기, 공기 이런 것들이 어떻게 하면 들어올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화인컷

정주리 감독에게 나미는 시나리오 단계부터 끝까지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인물이었다. 인물의 감정과 결을 따라가던 그는 어느 순간 기존에 상상했던 방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점에 도달했고, 그 고민은 자연스럽게 캐릭터의 설정과 캐스팅 전반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안도 사쿠라가 낙점됐다.


"처음에는 나미란 인물은 한국인으로 설정했어요. 그런데 뭔가 아닌게 하나씩 있었어요. 그게 뭘까 고민하면 가장 크게 걸리는게 나미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나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외로움, 슬픔 이런 것들을 내가 무슨 수로 완벽하게 알 수 있을까 싶었죠. 나도 모르는 영역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거기까지 갔어요. 그러면서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면 어떨까 싶었죠. '일본인이면 어때'라는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그렇다면 안도 사쿠라다'라고 떠올랐죠. 배우에게 했던 말은 '내가 온전이 나미를 알 수 없다. 나미는 나와 안도 사이의 인물이다. 그래야 인물이 살아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란 말을 했어요. 그리고 이후에 안도 사쿠라와 만났습니다. 한국어 시나리오를 일본어로 급하게 번역한 채로 봤을텐데 영화 전체를 잘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나미란 인물에 대해 저와 생각이 같달까요. 그런 부분에서 첫 만남에서 감동스러웠습니다. 내 눈앞에 나미가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했죠."


타이틀롤 도라 역은 그룹 아이오아이와 위키미키 출신의 배우 김도연이 맡아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선보인다. 정주리 감독이 처음 구상했던 도라의 이미지와 김도연은 사뭇 거리가 멀었지만, 김도연은 감독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아주 긴 오디션 끝에 최종적으로 선택했어요. 사실 김도연 씨는 제가 생각한 도라 모습과 전혀 달랐어요. 너무나 약하고 작고 취약함이 드러나는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긴 오디션 과정을 겪으며 도연 씨에게 회복한 이후의 도라 모습이 보였어요. 우직한 모습이요. 마지막이 도연 씨가 도라의 굳건한 모습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리고 도연 씨에 맞춰 시나리오를 수정했어요."


이처럼 일본의 대배우 안도 사쿠라의 합류로 화제를 모은 '도라'는 제작 방식 면에서도 국경을 허문 과감한 시도를 감행했다. 한국, 프랑스, 룩셈부르크, 일본 등 4개국이 의기투합한 국제 공동제작 프로젝트로 완성된 것. 프랑스의 여성 촬영감독 이리나 루브찬스키가 카메라를 잡아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했고, 한국과 유럽을 오가는 전방위적 후반 작업이 더해졌다.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 그리고 유럽의 베테랑 스태프들과 손잡고 하나의 작품을 빚어낸 경이로운 여정에 대해 정주리 감독은 깊은 만족감을 표했다.


"일본 배우와 함께 한국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제가 예상했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경험이었어요. 소통은 통역사를 통해 이뤄졌지만, 결국 중요한 건 말만이 아니더라고요. 서로 말하지 않아도 느끼는 감정과 방향을 계속 확인해가는 과정이었고, 끝내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됐죠. 촬영은 프랑스 감독님이 맡았는데, 영화를 만드는 내내 모두가 같은 감각과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저는 그 자체가 이번 작업의 큰 성취였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속 두 가족의 공기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어느새 도라라는 인물의 깊은 심연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정 감독은 관객이 도라를 동정하거나 쉽게 정의 내리기보다, 한 걸음 물러서서 온전히 바라보길 권했다.


"강박적으로 스스로에게 이야기 했던게 절대로 관객들이 도라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다른 인물들과 똑같이 거리를 두고 점점 도라에게 다가가는 듯한 느낌으로 영화를 보길 바랐어요. 당연히 선입견이 있을 수 있고 쉽게 판단할 수 있죠. 여전히 그걸 다 포함해서 지켜보셨으면 해요. 마지막엔 각자 생각하는 도라, 나미가 마음에 남기를 바랍니다."


전작 '도희야'와 '다음 소희'에 이어 이번 '도라' 역시 여성 캐릭터들이 전면에 나서지만, 정주리 감독이 가닿고자 한 종착지는 단순한 성별의 구도를 넘어선다. 그의 시선은 상처 입은 '다음 세대'의 생존과 회복이라는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감독은 자신이 아꼈던 고(故) 김새론에 대한 그리움을 꺼내놓았다.


"여성 감독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게 되지만, 특별히 여성 연대를 의식하며 접근한 작품은 아니에요. 저는 우선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려고 했어요. 다만 이번 영화에서는 여성성과 남성성보다는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어린 세대들이 어떻게든 살아남고, 끝내 스스로를 회복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희망은 그들에게 있다고 믿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김새론 배우는 저 개인에게도, 제작사에게도 정말 크고 소중한 배우였습니다. 그 배우를 잃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너무 힘들고, 우리 영화계와 사회가 결국 그녀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점이 아프게 남아 있습니다."



거장의 텍스트를 전복시킨 '도라'의 종착지는 결국 붕괴가 아닌 눈부신 회복이다. 정 감독은 원작 속 도라가 겪어야 했던 한계를 뛰어넘어, 영화 속 도라가 스스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체적인 인물로 나아가길 바랐다. 그 회복의 중심에 자리한 강력한 에너지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실제로 프로이트가 도라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잖아요. 대신에 전 영화에서 도라가 아픈 상태에서 결국 온전하게 회복해 실패했던 사례에 머물지 않고 다시 일어서길 바랐죠. 이 과정에서 여성성을 찾아간다기보단, 이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 도라에게 깃들어진 사랑을 생각했다. 나미에 대한 사랑이 도라를 회복하게 만들고 기어이 회복해 무언가 행위할 수 있는데까지 나아가는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인터뷰'를 네이버에서 지금 바로 구독해보세요!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