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혹한보다 더 힘든 건 ‘동료’와의 갈등 [위태로운 극지 생활②]
입력 2026.05.16 06:00
수정 2026.05.16 06:00
남극 과학기지 연이은 폭력사태 발생
고립된 공간서 사람 간 갈등 해소 한계
스트레스 가장 큰 원인은 동료 간 갈등
심층 면담 등 상담 시스템 전문화 필요
장보고과학기지 모습. ⓒ극지연구소
남극기지에서 발생하는 폭력 사태 주요 원인이 ‘동료 간 갈등’이라는 분석에 따라 월동대원들의 정신 스트레스 관리 등 대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최근 남극 장보고기지에서는 대원 간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신체적으로 피해를 본 사람은 없었지만, 이런 폭력 사태가 과거에서 종종 발생했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해법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
유규철 극지연구소 박사는 과거 남극기지 대장 역할을 맡았을 때 가장 큰 고민거리로 대원 간 발생하는 사고를 손꼽았다.
유 박사는 2019년 중앙일보에 기고한 ‘유규철의 남극일기’에서 “대장으로 임명받고 남극으로 떠나면서 큰 걱정거리 중 하나는 대원들의 사고”라고 했다.
그는 “우려했던 걱정은 과연 우리가 갈등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라며 “30년의 세종기지와 4년의 장보고기지 역사를 뒤돌아보면 대원들 사이 발생한 갈등이 많았다”고 우려했다.
대원별 시험과 면접을 통해 각기 다른 전공으로 선발하고, 1년 계약직 형태로 채용하다 보니 대원별 인성과 성품을 판단하기 너무 어려웠다는 게 유 박사 설명이다.
유 박사는 “월동대는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나이와 직업군으로 구성돼 세대와 사고방식, 사회 활동 공간도 다르다”며 “한정된 공간, 추위, 고립, 밤만 계속되는 극야(極夜)는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유발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고립된 공간에서 분야별 임무 외에 청소나 설거지, 당직, 물품 나르는 공동 작업 등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며 “미국 항공우주국 연구 결과에서도 (대원 간) 갈등이 가장 힘든 스트레스로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대원들 사이 발생하는 갈등이 극한 생활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로 작용한다는 연구 결과는 또 있다. 2016년 당시 이은경 KBS 기자가 쓴 일본 도쿄대 연수 보고서 가운데 ‘장보고 기지 월동대원들의 정신적 스트레스에 대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인간관계와 대원 사이 갈등이 3대 스트레스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 기자는 당시 남극 장보고기지 16명의 대원을 나이, 성별, 월동 경험, 결혼 여부 등으로 구분해 조사했다.
나이는 29세부터 62세까지 다양했다. 인터뷰는 통신과 의료, 중장비, 설비, 소방, 조리, 발전 등 업무별로 진행했다.
연구 결과 스트레스 종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먼저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다. 각자 전공이 다르다 보니 대원 한 명이 일을 하지 못하면 다른 대원이 대체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 컸다.
다음으로 극지라는 특수한 환경 스트레스다. 고립된 공간과 혹독한 기후, 반복되는 생활 양상 등이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특히 해가 뜨지 않는 극야 기간(5~8월) 발생하는 스트레스는 가장 심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스트레스다. 대원들 사이 인간관계 문제다. 이 또한 극야 기간 스트레스 밀도가 높았다.
이 기자는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갈등을 3개 유형으로 분류했다. 세대 간 갈등과 업무 내용 차이에 따른 부담, 비정규직 대원의 고용 불안도 있었다.
이 기자는 해법으로 대원들에 대한 ‘카운셀링 시스템’ 마련을 제시했다. 이 기자는 “전문 상담사와 객관적인 상담하고 싶다는 요구가 높았고, 월동을 경험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선배 대원들과 일대일 네트워킹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말했다.
월동대원과 사회를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남겼다. 월동대원과 학교를 연결하는 ‘남극교실’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는 게 이 기자 판단이다. 이 경우 월동에 대한 사회적지지 확보와 월동대원 심리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기자는 “(조사) 모집단 숫자가 부족하고 개개인의 특수한 상황이 많아 일반화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며 “설문처럼 질문 항목을 정한 것이 아니라 통계화하지 못해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과학기지 운영 기관인 극지연구소는 “이번 사건을 매우 엄중하고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고, 상황별 매뉴얼 재정비와 선발 및 교육 체계 개편을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극지연구소는 “경찰 조사에도 적극 협조하고 있다. 사고 원인을 개인 요인과 구조적 결함 모두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조사 결과에 따라 대책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보강하겠다”고 말했다.
특히 “장기간 고립된 조건에서도 모든 이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안전한 업무 환경이 유지되도록, 기지 운영 전반의 예방 및 대응 역량을 근원적으로 높이는 데 초점을 두고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