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주문도 못 믿는다"…불경기에 노쇼까지 불안한 자영업자들
입력 2026.05.08 07:00
수정 2026.05.08 08:01
'자영업자 피눈물' 노쇼 사기 기승
피해액수, 1분기만 600억원 넘어
"범정부 차원의 예방책 시급"
ⓒ데일리안 AI 이미지 삽화
경기도에서 공구·철물점을 운영하는 A씨는 지난달 한국남부발전 신인천빛드림본부 조달계약처 직원이라는 이수호 씨로부터 2000만원이 넘는 소방엔진펌프용 스타터모터 납품 발주를 요청 받았다.
50대 초반의 나이에 은퇴해 소소한 벌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창업이었지만, 7개월 째 적자를 내 골머리를 앓던 중 반가운 주문이었다고 한다.
이 씨는 "조달청 계약파기로 급하다. 모터가 납품이 안 되면 본인 승진이 누락된다. 기존에 '대한산업안전' 주식회사와 거래를 했는데 계약이 파기됐다"면서 A씨에게 대한산업안전 김원일 부장 명함을 건넸다.
A씨는 이 씨가 기존 거래처라고 건넨 명함에 회사 대표 번호가 누락돼 의심을 했지만, 곧 이 씨가 발송한 3841만2000원이 기입된 기업은행 이체예약 명세서를 받아 들고 비로소 안심해 납품을 결정했다.
그러나 납품을 의뢰한 업체의 배달기사는 연락조차 오지 않았고, A씨가 대한산업안전에 전화를 해보니 회사에선 '신종 노쇼형 사기'라는 말만 돌아왔다. 창업 7개월 만에 노쇼 사기 한 번으로 2000만원이 넘는 돈이 하루 아침에 증발한 것이다.
A씨는 자신이 당한 사기 사건을 신고하기 위해 김포경찰서를 찾았다. 신고를 위해선 녹음내용·문자내용 등 제출해야 할 증거도 많았다. 경찰서엔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줄을 서 있었다.
현재 대한산업안전은 자사 홈페이지에 '긴급 알림'이라는 공지를 올려 "관공서를 사칭한 물품 대량 구매 문의 및 대행 사기에 각별히 주의해달라"고 안내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경기 불황 속 자영업자 '피눈물' 뽑는 노쇼 사기
'군 부대 사칭'으로 시작해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노쇼 사기가 경기 침체와 소비 위축이 장기화 하는 올해에도 수많은 자영업자들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있다.
쳇지피티 등 AI(인공지능)를 기반으로 가짜 명함과 공문서, 발주서, 견적서를 만들어 신뢰성을 높인 뒤, 사기를 치는 고도화된 수법이 전횡을 부리면서 피해액도 크게 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노쇼 사기 피해금액만 614억9000만원이다. 이는 지난해 피해금(1256억7000만원)의 절반에 달한다.
대량 주문에 기대를 갖는 소상공인, 자영업자의 심리를 교묘히 악용하는 이 같은 사기 행각은 자영업자들의 불안을 키우고, 결국 구매 의사가 있는 다른 고객에 대한 의심으로 확산해 '신뢰 비용'의 증가로 이어져 이중 피해를 발생시킨다.
청와대 전경 ⓒ뉴시스
청와대도 '노쇼' 의심 받았다
제대로 된 주문까지 의심받는 사례가 신뢰비용, 즉 사회적 비용을 일으킨다는 직접적인 사례도 있다.
한국경제신문에 따르면 포항남부경찰서는 지난달 23일 오전 11시31분께 "청와대를 사칭한 피싱 전화가 의심된다"는 112 신고를 접수했다.
신고자는 포항시 송도동에 있는 지역 제과업체로 이 업체는 자신을 청와대 직원이라고 소개한 이의 전화 주문을 받았다. 그러나 별도 공문이 오지 않아 피싱 조직의 범행 시도로 의심했고, 주문 이튿날 입금됐는데도 계좌가 피싱에 연루된 것으로 오해하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 주문은 청와대 직원이 한 정상 거래였다. 노동절을 앞두고 행사용 베이커리를 준비하기 위해 지역 업체를 물색하던 청와대는 이 업체에 장미빵 700개(105만원어치)를 주문한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연합뉴스
사후약방문 아닌 범정부 차원 예방책 시급
이 같은 노쇼 사기는 공공기관과 일반 자영업자들 사이 거래 신뢰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단순 금전 피해 뿐만 아니라, 행정 신뢰 자체를 위협하는 중대 범죄로 확산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이를 막기 위한 해법은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앞서 공정위가 노쇼로 피해를 보는 자영업자들의 성토를 들어 예약시 계약금을 받을 것을 권고하고 있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다. 이로 인해 자영업자들은 결국 경찰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공정위를 피감기관으로 두고 있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중진 의원실 관계자는 "공정위가 예약시 일정 계약금을 걸도록 자영업자들에 권고를 하고는 있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사항 수준이라 노쇼 사기 관련해 들여다 볼 수 있는 부분이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노쇼 사기는 결국 사회의 신뢰 자본을 갉아먹는 악질 범죄지만, 범인이 작정하고 사기를 친 것은 형사 문제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며 "정무위에서도 노쇼 사기 관련한 법적 제도 마련을 들여다 보곤 있지만, 현재로선 뚜렷한 대책이 없는 실정"이라고 했다.
현재 경찰에서는 자영업자들이 노쇼 사기에 대한 경각심을 키워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언급된 사례와 같이 대량 주문 요구가 들어오면 휴대전화가 아닌 실제 사무실 번호로 전화해 관련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 같은 권고는 사전 예방차원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생계에 한시가 급박한 자영업자들이 일일이 자가 검열을 하기 어렵고, 결국 피해를 입은 뒤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사후약방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염건웅 유원대 경찰소방행정학과 교수는 "경찰 차원에서만 노쇼 사기를 대응한다면 결국 범죄를 뒤쫓는 상황에 불과하다"며 "지금은 예방을 위한 프레임으로 전환해야 할 때로, 국회 차원의 입법적 보완, 공정위와 경찰의 TF(태스크포스) 구성, 범정부 차원의 전방위적 대응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