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룡유회 또는 지족불욕
입력 2026.04.10 10:49
수정 2026.04.10 10:51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일 미 워싱턴DC 백악관 브리핑실에서 이란 사태에 대해 발언하며 총을 쏘는 시늉을 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미국-이란 휴전
미국과 이란이 2주간의 휴전에 전격 합의했다. 종전을 원하면서도 ‘강공’ 블러핑으로 일관하던 트럼프와 이란이 처음으로 본심을 드러낸 것이다.
계기는 F-15 격추와 무기통제관 구출 사건이었다. 필자가 바로 며칠 전 ‘트럼프 구사일생’이란 칼럼을 쓰기도 했지만 트럼프로서는 휴전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덕분에 국제유가와 국제 자본시장도 안정세로 접어들었다.
외국 언론의 표현에 따르면 전쟁 당사국 아닌 나라 가운데 최악의 피해를 입은 한국 경제도 큰 고비를 넘길 것이다. 지상전은 없다, 전쟁은 비교적 단기간에 끝난다, 필자가 예언한 대로다.
그러나 최종 종전 협상은 길고 지리할 것이다. 몇 달 정도가 아니라 몇 년 걸릴 수도 있다. 어려운 협상에 임하는 트럼프에게 꼭 들려줄 말이 있다.
항룡유회 또는 지족불욕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신묘한 셈법은 땅의 이치를 꿰뚫었도다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전쟁에 이겨 그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612년 음력 7월 살수(오늘날의 청천강)에서 수나라 대군 30만을 쳐부순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수 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다.
을지문덕 장군은 이 시에서 노자 도덕경의 표현을 일부 빌려왔다. 노자는 도덕경 44장에서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라 가르친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오래 지속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주역 건괘(乾卦)에는 ‘항룡유회 영불가구야(亢龍有悔 盈不可久也)’란 말이 보인다. “높이 오른 용은 후회한다. 가득 찬 것은 오래갈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뜻이다. 모두 절정에 달해 내려갈 일만 남은 상황에 대한 경고로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겸손해 화를 면하라는 지혜를 담고 있다.
수양제와 당태종의 교훈
수 양제 양광은 남북조를 통일하고 대운하를 건설하는 등 초기 업적은 대단했다. 그러나 멈출 줄 몰랐다. 살수 대패 이후에도 한번 더 고구려 원정군을 띄웠다가 결국 나라가 망했다.
수나라에 이어 중원을 장악한 당 태종 이세민은 달랐다. 고구려 원정에서 양만춘이 이끄는 안시성에 막힌 다음 더 이상 고구려 정복을 고집하지 않았다. 덕분에 당 태종은 정관의 치로 알려진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고, 중국 역사에 길이 빛나는 명군으로 남을 수 있었다.
수 양제와 당 태종의 중국 정권의 대를 이은 고구려 정복의 비원은 7세기 후반, 고구려의 내분으로 쉽게 이루어졌다. 연개소문 사후 남생·남건·남산의 삼형제는 후계자 다툼을 벌였고 장남 남생이 당나라군을 안내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귀부해버렸다. 내버려두면 내분으로 무너지는 예는 삼국지에도 나온다. 관도 대전에서 고전하던 조조는 유비의 의동생 관우의 분전으로 대승을 거두고 원소군의 주력을 쳐부순다.
그러나 조조는 원소의 아들이 하북으로 달아나자 추격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결국 원소의 아들들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서로 싸우다가 완전히 멸망했다.
트럼프에게 주는 교훈
주역의 ‘항룡유회’나 노자가 경고한 ‘지족불욕 지지불태’는 현대 정치와 기업 경영 그리고 21세기 국제정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이나 ‘과도한 무력 과시’는 지도자에게 가장 큰 독이다.
필자가 여러 차례 강조하거니와 트럼프는 자랑스럽게 전쟁을 끝낼 기회가 많았다. 개전 당일 이란 수뇌부 50명을 제거했고 이란의 핵과 미사일 능력 그리고 공군과 해군력을 말살했다. 군사적 승리는 충분했다. 호르무즈 봉쇄는 예상했던 바고 국제 유가 폭등 역시 시나리오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지 않던 F-15 격추와 이란 땅에 남은 무기통제관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천신만고 끝에 무기통제관 구출은 성공했지만 너무나 대가가 컸다. 어쩌면 전력 손실은 개전 후 가장 컸을 수도 있다.
만약 고위 장교인 무기통제관이 이란의 포로가 되어 생중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면? 군사적 손실을 넘어 국가적 자존심과 리더십에 치명타를 입히는 ‘대봉욕’이 되었을 것이다. 트럼프는 중간선거 패배가 가시화되고 탄핵의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트럼프는 ‘이란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탐욕으로 협상의 주도권을 이란에게 넘겨주고 가장 견제해야 할 중국에게 생색 낼 기회를 주고 말았다.
협상, 상대를 위한 배려
옛날 경주 최부자는 추수를 하면서 일부터 벼이삭, 보리이삭을 들에 길에 흘렸다 한다. 어려운 사람들이 이삭을 주워서라도 연명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저녁종’이 바로 그 이삭줍기를 그린 명화다.
그러나 세상에는 마지막 동전 한 닢, 마지막 벼이삭 한 알까지 남김없이 쓸어야 속시원한 자들이 있다. 정보의 비대칭성을 최대한 악용해 한 탕해서 폭리를 취하려는 부류들이다. 기획부동산이나 주식시장의 작전세력, 일부 정상배들이 그런 자들이다.
이들은 마지막 동전 한 닢, 마지막 벼 한 알에 미련을 두다가 위험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이란의 자부심이나 신정주의 체제, 위대한 순교자 이런 거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이란은 개전 첫날 이미 전쟁 계속의 의지와 힘을 잃었고 단지 항복의 외양이 아닌 종전을 원했을 뿐이다.
지금도 협상에서 욕심을 부리려는 트럼프에게 말한다. ‘지이영지 불여기이(持而盈之 不如其已), 잔을 가득 채우려고 하는 것은, 그만두는 것만 못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