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배우조합-할리우드 스튜디오 합의안 6월 30일 만료…AI 파도 속 재협상 돌입 [D:영화 뷰]
입력 2026.04.07 09:26
수정 2026.04.07 09:27
기술의 속도가 협약 앞질렀다, 2026년 재협상에 걸린 할리우드의 운명
미국 배우조합과 할리우드 스튜디오 간 단체협약이 다시 협상 테이블 위에 올랐다. 올해 2월 9일 협상을 시작해 3월 추가 연장까지 거쳤으나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고, 공식 협상은 6월에 재개될 예정이다. 2023년 대규모 파업을 거쳐 체결된 계약이 6월 30일 만료를 앞두면서, 할리우드는 AI 대응을 둘러싼 또 한 번의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다.
핵심 당사자는 배우 노조인 SAG-AFTRA(미국배우방송인조합)와 AMPTP(미국제작사연맹)다. AMPTP는 넷플릭스·디즈니·워너브러더스디스커버리·아마존 등 350여 개 제작사를 대표해 협상에 나서는 단체로, 사실상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 전체의 입장을 대변한다.
ⓒ뉴시스/AP
이번 재협상을 이해하려면 20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해 작가조합(WGA)이 5월에 먼저 파업에 돌입하고, SAG-AFTRA가 7월에 합류하면서 두 조합이 동시에 파업에 나선 것은 1960년 이후 63년 만의 일이었다. 제작 현장은 전면 중단됐고, 수십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118일간의 파업 끝에 타결된 합의안에는 AI 관련 핵심 조항들이 담겼다. 배우의 디지털 복제본이 사용될 경우 해당 배우가 직접 촬영했을 때 필요한 일수를 기준으로 일할 보상을 받아야 하며, 프로듀서는 이를 성실하게 산정해야 한다는 의무가 명시됐다. 또한 AI 학습에 자신의 초상·목소리·연기 데이터가 사용되는 것을 거부할 권리, 디지털 복제본 생성 시 사전 서면 동의권도 규정됐다. 당시로서는 의미 있는 성과였다. AI가 제도적 공백 속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배우를 대체하는 시나리오를 막을 최소한의 방어선이 세워진 것이었다.
문제는 기술의 속도였다. 합의 당시만 해도 AI는 스크립트 초안을 돕거나 이미지 레퍼런스를 생성하는 보조 도구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생성형 AI는 이제 단순한 보조 도구를 넘어, 배우의 연기·표정·동작까지 재현하는 단계로 진입했다. 일부 제작 환경에서는 군중 장면, 보조 캐릭터, 심지어 특정 배우의 젊은 시절까지 AI로 구현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기술의 확산 속도가 협약의 규정 범위를 빠르게 넘어섰음을 의미했다.
이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2025년 9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공개된 AI 배우 틸리 노우드다. 네덜란드 배우 출신이자 프로듀서 엘린 데르 벨던은 취리히 필름 페스티벌 부대 행사 무대에 올라 자신이 만든 AI 캐릭터 틸리 노우드를 소개하며, 여러 에이전시가 그를 영입하는 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틸리 노우드는 제작사 파티클6의 AI 부문 자회사 시코이아가 만든 완전 합성 캐릭터로, 수백 명의 배우 데이터를 학습시켜 생성됐다.
할리우드는 경악했다. 배우 에밀리 블런트는 버라이어티 팟캐스트에서 "정말 무서운 일이다. 에이전시들, 제발 멈춰달라"고 호소했고, 나타샤 리온은 "어느 에이전시이든 여기에 연루된다면 모든 조합에서 보이콧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SAG-AFTRA는 즉각 성명을 내고 틸리 노우드는 배우가 아니라 허락도 보상도 없이 수많은 전문 배우들의 연기를 학습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의 산물이라고 규정하며, 이는 배우들을 일자리에서 몰아내는 문제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틸리 노우드 사태는 2026년 협상이 어떤 지형 위에서 펼쳐질 지를 예고한 셈이 됐다. 이번 협상에서 핵심 전선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AI 학습 데이터 보상이다. 기존 합의는 AI 학습에 대한 거부권을 중심으로 설계됐지만, 이제는 이미 수집·활용된 데이터에 대한 보상 문제까지 확장되고 있다. 배우들의 과거 출연작이 AI 모델 학습에 쓰였을 경우 소급 보상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스튜디오가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는 지가 핵심이다. 배우의 과거 연기 데이터가 학습에 사용됐다면, 그 성과에 대한 수익 분배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도 논의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두 번째는 이른바 '틸리세'다. AI 합성 캐릭터를 사용할 경우 실제 배우를 고용하는 것과 동등하거나 더 높은 비용을 스튜디오에 부과하자는 개념으로, 틸리 노우드의 이름을 따 비공식적으로 이렇게 불린다. 스튜디오가 AI 합성 캐릭터를 영상 제작에 기용할 때 실제 배우 고용에 상응하는 수수료를 노조 기금에 납부하게 하는 방식이다. AI를 도입하는 가장 강력한 경제적 동기인 인건비 절감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려는 협상 카드다.
세 번째 핵심 전선은 배우들의 사회적 안전망 사수다. SAG-AFTRA를 비롯한 주요 조합의 건강 및 연금 플랜은 스트리밍 전환에 따른 일자리 감소와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이 맞물리며 심각한 적자 상태에 놓여 있다. AI 도입이 가속화할수록 이 문제는 더욱 절박해질 수밖에 없다.
SAG-AFTRA는 법적 규제보다 빠르게 작동하는 단체교섭을 통해 AI 활용 범위를 구체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의회 입법이나 주 법률이 제도화되기까지 수년이 걸리는 반면, 단체협약은 협상 테이블에서 즉각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 측 역시 물러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스트리밍 경쟁 심화와 제작비 상승 압박 속에서 AI가 비용 효율을 높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로 부상한 상태다. 특히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장에서 콘텐츠 공급 속도가 경쟁력으로 직결되는 구조에서, AI는 제작 시간 단축과 리스크 분산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제공한다. 노조가 AI의 고삐를 죄려 할수록, 스튜디오는 그 줄을 늦추려 할 수밖에 없다. 양측의 셈법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번 재협상은 단순히 권리를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 AI 활용 자체의 경제적 동기를 낮추려는 고도의 전략적 싸움으로 변모했다. 스트리밍 경쟁 속에서 비용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스튜디오 측과 인간 노동의 고유 가치를 사수하려는 노조 측의 팽팽한 대립은 할리우드를 넘어 전 세계 콘텐츠 산업의 향방을 가를 중대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할리우드의 기준이 사실상의 글로벌 표준으로 작동해 온 만큼, 한국을 비롯해 이미 AI 제작 기술을 실험 중인 각국의 제작 관행과 노동 규범에도 이번 협상 결과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