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장남 이지호 소위가 칭찬받는 이유
입력 2025.12.11 07:07
수정 2025.12.11 07:07
미국 국적 포기하고 입대했으며 동기에게 뽑혀 임관식에서 대표 선서
곳곳에서 병역 기피 스캔들이 불거지는 가운데 나온 신선한 충격
모든 기업에서 후계자들을 장교로 입대시키는 방안도 고려해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오른쪽)과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왼쪽)이 지난 11월28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제139기 해군·해병대 사관후보생 수료 및 임관식에서 이지호 신임 소위(가운데)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아들인 이지호(24) 소위가 지난 11월 28일 ‘제139기 해군·해병대 사관후보생 수료 및 임관식’에서 해군 장교가 되었다. 대한민국 최고 기업이자 최대 재벌의 오너 4세가 병역을 회피할 수 있는 미국 국적을 포기한 뒤 정신적, 육체적으로 쉽지 않은 해군 장교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11주간의 훈련 과정을 거뜬하게 마쳤다. 임관식에서 이지호 소위는 동기 84명의 대표로 선정돼 임관 선서와 제병 지휘를 맡았다. 동기들의 추천을 받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만일 훈련 기간 중에 ‘뺀질이’ 모습을 보였다면, 동기들이 절대 추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박수가 쏟아졌다. 재벌, 정치인, 연예인의 병역 기피 스캔들이 속속 불거진 가운데 나온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지호 소위의 늠름하고 듬직한 외모는 상승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날은 삼성의 대(對)사회 커뮤니케이션 역사에도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총수 일가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를 높여 주는 효과 말이다. 사실 CJ, 신세계, 한솔을 포함한 범(汎)삼성가 오너 일가에 병역면제를 받은 비율은 73%나 됐다. 그러니 이지호 소위가 얼마나 돋보이는지 알 수 있고, 특히 장교는 처음이다. 삼성의 고위 임원은 “삼성그룹에서 해야 하는 10년 치의 홍보 실적을 이지호 소위 혼자 해냈다”고 말할 정도다.
재계에서는 이미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둘째 딸인 최민정 씨가 2014년 해군 장교로 자원입대해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 편의점과 과외를 통해 생활비와 학비를 스스로 벌었다고 밝혀 세간을 놀라게 했는데, 군대에서도 아덴만 청해부대 파병이나 서해 NLL 방어 등 위험도 높은 보직을 자원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주목받았다. 2017년 중위로 전역한 그녀는 지금은 인테그랄 헬스의 CEO가 되어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장남인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차남 김동원 한화생명 사장과 함께 모두 공군 장교 출신이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아들인 정기선 HD현대 회장은 아버지와 같은 ROTC(학군장교) 출신으로 2007년 육군 중위로 전역했다. 일반병 입대 사례도 많다. 최신원 전(前) SK네트웍스 회장의 장남인 최성환 SK네트웍스 사장은 해병대 수색대에 자원입대했고, 코오롱그룹 4세인 이규호 부회장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육군 현역으로 만기 제대했으며,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의 장남 정해찬 씨도 한국에 돌아와 육군에 입대해 2023년 병역 의무를 마쳤다.
한국 사회에서 병역은 극히 민감한 문제다. 일반인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의무인 군 복무를 재벌이 했다고 뉴스가 되는 이유는 그동안 온갖 파워나 연줄을 동원해 군대 면제나 특혜를 받아 온 히스토리가 많아서이다. 재벌이 국민과 가까워지지 못했던 한가지 이유였다. 정당한 사유가 있어서 병역면제를 받는다면 절대 비난받아 안 되지만, 병역 기피의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다만 요즘 MZ 세대 경영자들은 조금 달라지고 있다. 물론 일부 기업을 보면 여전히 고압적이고 망나니 행동을 하는 후계자들이 있고 최근에도 몇몇 중견기업 오너 장남들이 미국 국적을 선택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는 있다. 하지만 다른 일부에서는 재벌가에 고질적으로 따라붙던 ‘병역 특혜’ 프레임을 벗어 던지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꾸준히 왕실 폐지론이 제기되지만, 그래도 대다수 국민이 왕실을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군 복무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부친인 조지 6세는 1차 대전에 직접 참전했고, 남편인 필립 공은 물론이고 아들인 찰스 3세 국왕과 앤드루 왕자, 손자인 윌리엄과 해리 왕자 모두 군 복무를 마쳤다. 앤드루는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 해군 조종사로 참전했고, 해리는 전쟁 중이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국민의 인정을 받기도 했다.
이지호 소위가 임관하면서 밝힌 좌우명. ⓒ 뉴시스
재벌 자제들이 군 복무, 특히 장교로서 근무하게 되면 2가지 관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째, 회피할 수 있었음에도 육체적· 물리적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은 리더로서의 정당성 확보에 큰 도움이 된다. 리더가 리더로서 인정받으려면 놀라운 성과를 내거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거나, 아니면 구성원이 겪는 ‘힘듦’에 동참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그래야 리더로서 공감과 존중을 받게 된다.
군 복무란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히 괴롭다. 논산훈련소 등지에 사병으로 입대하든 장교가 되기 위한 사관후보생 교육을 받든, 밀도 높은 단체생활에다 유격훈련이나 200km 행군같이 자신을 극한적으로 밀어붙이는 훈련을 받게 마련이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알지만, 나이가 들어 어려운 상황을 겪을 때마다 군대 시절의 ‘극복 경험’이 용기를 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재벌 후계자가 직접 총을 들고 진흙탕에서 낮은 포복으로 철조망을 건너는 모습을 보여 주면 그저 철부지 왕자 이미지와는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된다. 이지호 소위가 이번에 소개한 ‘고통 없이 인간은 진화하지 못한다. 그러니 즐겨라’라는 좌우명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
둘째, 재벌가에서 이루어지는 폐쇄적이고 이론적인 경영수업이 아니라 광야로 뛰쳐나와 현장 리더십 훈련을 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이제는 오너의 리더십도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시대다. 그런 점에서 군대 입대, 특히 장교 복무는 생생한 리더십을 양성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앞으로 모든 기업체에서 후계자들을 군 장교로 입대시키는 걸 고려한다면 어떨까.
요즘은 취업난이 심각하다 보니 많이 줄었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기업들 사이에는 ‘전역 장교 특별채용’이란 제도가 유행했다. 주로 중위나 대위급이 많았다. 실제 영업, 마케팅, 생산 현장에서 비(非) 장교 출신들보다 눈에 띄는 성과를 낸다는 것이 인사팀의 평가였다.
그런데 현재 우리 군은 초급장교 기근을 겪고 있다. 1961년 시작된 ROTC의 경우 임관자 수가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올해 2월 임관한 숫자는 서울대 7명, 고려대 5명, 서강대 6명, 한양대 2명에 불과하다. 육군 병사로 입대하면 18개월인데 ROTC 장교는 28개월 복무에다 재학 중 방학에는 3개월 기초군사훈련까지 받아야 한다. 처우 면에서도 올해 병장 월급이 150만원인 반면, 소위의 첫 월급은 189만원으로 격차가 별로 없다. 학사장교 등도 비슷한 현상이다. 유능한 초급장교는 전투력의 허리이고 리더십의 축인데, 충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다.
한편 이재용 회장은 2020년 5월 6일 “저는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입니다”라고 선언했다. 당시 무엇에 쫓기듯 왜 서둘러 그런 자기부정 선언을 했는지 의문이다. 삼성에 대한 문재인 정권의 압박이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
결코 재벌 승계를 옹호해서가 아니다. 혹시 좌파들이 끊임없이 주장해온 재벌해체론에 의해 그런 선언이 나왔는지 궁금하다는 말이다. 삼성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 금융기관, 시민단체 등이 삼성의 경영권을 좌지우지(左之右之) 행사하는 세상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리나라 시스템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한국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은 어떠한지 주도면밀하게 연구해야 한다. 그래서 그날 발언의 진상은 밝혀질 필요가 있다.
어쨌든 이번에 늠름하고 품격있는 모습을 보여 준 이지호 소위에 대한 국민의 시각은 매우 따뜻하다. 이지호 소위가 39개월 동안 군 복무를 잘하기를 기대한다. 모처럼 재벌의 훈훈한 모습을 보아 기분 좋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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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홍섭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