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불행과 '번개가 떨어졌다' [D:쇼트 시네마(66)]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4.02.26 12:33
수정 2024.02.27 08:50

김지홍 감독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 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번개에 맞을 확률은 60만 분의 1이라고 한다. 이 어려운 확률을 뚫고 어느 날 갑자기 한 남자(최선우 분)가 떨어지는 번개에 맞아 쓰러졌다. 예고되지 않은 사건으로 남자는 오랜 시간 식물인간으로 누워지내야 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깨어났다.


역할 대행을 하는 여 자는 번개에 맞았던 남자의 누나 역할을 맡게 된다. 어려운 건 없다. 그가 건네준 대본을 읽고 그대로 연기를 하면 된다. 이 대본은 현실 남매의 대화가 담겨있지만 사실 실제 남자와 여자의 남매 사이는 아니라고 한다. 남자의 의도를 잘 알 수 없지만 여자는 남자가 정해준 역할을 수행한다. 남자는 여자의 대사가 틀리면 상황을 끊고 잘못된 점을 지적한다. 마치 영화 속 또 하나의 영화가 진행되는 것 만 같다.


진짜 남매 같은 사이가 된 남자와 여자의 상황극은 점점 남자가 번개에 맞았던 그날에 가까워진다. 남자의 가족들은 지극정성으로 그를 돌봤던 모양이다. 담배 냄새가 나는 아빠의 손길, 꽃향기가 나는 다정한 엄마의 손길, 핸드크림 냄새가 나는 누나의 손길이 번갈아 가며 그를 간호했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의 불행은 곧 한 사람으로 심연으로 이끌게 된다. 시간이 갈 수록 가족의 손길을 투박해져 갔고, 누구의 손길인지 구분할 수도 없게 됐다.


여자는 남자가 그만 이 상황에서 메여있지 않길 바라며 이 역할 놀이를 끝내려 한다. 남자는 마지막이라며 대본을 건넨다.


이날의 상황은 번개에 맞은 채 병상에 누워있는 남자를 향해 누나가 속내를 고백하는 신이다. 여자는 눈을 감고 남자에게 뱉어서는 안되는 말을 하고 만다. 동생이 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솔직해진 것이지만, 남자는 누나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 남자는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번개를 맞은 건 남자의 탓이 아니다. 물론 가족의 탓도 아니고 누구를 향해 원망할 수도 없다. 그대로 자신의 상황에 매몰돼 허우적 거릴 뿐이다. 이 역할극은 남자가 자신의 슬픔을 마주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누나 역할을 한 여자를 통해 번개보다 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 그날로 돌아간 남자는 더 이상 남매 연기는 그만두게 됐다. 여자에게 가족을 만나러 갈 것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여자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다. 화면의 양 끝에서 서성이던 남자와 여자가 시간이 지날 수록 화면의 중앙으로 들어오는 배치가 인상적이다. 번개처럼 어느 날 불행을 맞은 사람들이 자기혐오와 제자리걸음을 멈추길 바라는 잔잔한 응원가다. 러닝타임 24분.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