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文정권 냉대 끝나자…5년만에 국회 돌아온 김종필 추도식
입력 2023.06.24 05:00
수정 2023.06.24 05:07
정우택·정진석·김태흠 끝까지 자리
"세상 바뀌었다" 정상화 노력도 고해
文, JP 서거에도 빈소 조문 외면하고
냉대…"현대사 부정이자 충청 홀대"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5주기 추도식이 국회에서 엄수됐다. 문재인정권 시절 서거한 김 전 총리의 추도식은 엄혹했던 시기 내내 부여 가족묘원에서 치러졌다. 헌정사 최다선인 김 전 총리의 영(靈)이 5주기를 맞이해 국회로 돌아온 모습에 "세상이 바뀌었음을 확실히 느낀다"는 말이 나왔다.
'충청의 맹주' 김종필 전 총리(JP)의 5주기 추도식이 23일 오후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추도식장에는 김 전 총리의 정치적 적자(嫡子)로 불리는 '충남의 맹주'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 '충북의 맹주' 정우택 국회부의장, '충청권 차세대 리더' 김태흠 충남도지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직접 추도사를 했다. 세 사람은 JP의 정당인 자민련에 몸담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우택 부의장은 이날 추도사에서 "총리는 한국 정치의 큰 별이셨다. 산업화와 근대화·문민화·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대한민국을 일궈온 시대의 지도자"라며 "임종하기 하루 전날 청구동에서 만져봤던 손끝 온기가 지금도 온전히 느껴진다"고 회상했다.
이어 "정치안정·경제회복·지역화합·국민통합·평화통일·선진국가는 총리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이루려던 국가적 과업으로, 못 다 이룬 과업은 여전한 우리의 정치적 숙제"라며 "당신께서 묘비에 새겼던 사무사(思無邪)의 정신으로 국리민복·국태민안의 구현을 위해 정치후학들이 함께 헌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존경하는 총리! 많이 그립다. 총리의 영원한 평온과 안식을 빌며 엎드려 절을 올린다"는 말로 추도사를 마치면서 정 부의장은 슬픔이 북받치는 듯 울먹이며 말을 채 끝맺지 못해 좌중을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뒤이어 연단에 오른 정진석 의원은 "나는 총리의 문하생으로, 사적 인연으로 친다면 총리를 '아버님'이라 불러야할 사이"라며 "선친(정석모 자민련 전 부총재)과 총리는 공주고 졸업동기생으로, 나는 총리의 가르침에 따라 정치를 이어왔고 자민련 대변인을 맡아 총리를 가까이에서 모셨다. 지금은 총리의 지역구인 부여까지 내가 이어받았으니 보통이 넘는 인연"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총리는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3김 시대'를 이끌었다"며 "최대 정적(政敵)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역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내지 않았느냐. 총리야말로 이 땅의 민주화를 이룩해낸 진정한 디딤돌"이라고 회고했다.
김태흠 지사는 추도사에서 "87년 총리를 따라 정치에 들어선 내게 총리는 언제나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큰바위 얼굴'"이라며 "5주기 추도식을 맞아 총리가 즐겨쓰셨던 소이부답(笑而不答)이라는 말이 떠오른다"고 그리움을 나타냈다.
정우택, 추도 중 북받치는 슬픔에 울먹
정진석 "몸 불편해지자 '오른손에 힘
안 들어가 골프 샷 잘되겠다'고 말씀"
JP 특유의 해학·유머, 좌중 전하기도
1926년 충남 부여 출생인 김종필 전 총리는 불과 30대 중반이었던 1961년 5·16 군사혁명으로 현대사와 우리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집권 공화당 창당을 주도한 김 전 총리는 1963년 총선에서 고향 충남 부여에 출마해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9선 고지에 올랐다. 김영삼 전 대통령, 박준규 전 국회의장과 함께 헌정사 최다선에 해당한다.
또 김 전 총리는 1971년부터 75년까지 국무총리를 지내며 중화학공업을 집중 육성해 산업 도약의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다시 한 차례 총리를 맡아 수평적 정권교체 이후 연립내각을 이끌며 정치안정과 IT정보화에 주력했다. 75년 헌정사에 대통령제 하에서 총리를 두 차례 지낸 인물은 김 전 총리와 백두진·고건 전 총리, 한덕수 현 총리 등 네 명 뿐이다.
2004년 정계를 은퇴할 때까지 43년 간의 정치인생 동안 극단의 대립과 갈등을 피하며 통합과 연대, 조정과 중재의 묘를 발휘했다. 정치권이 경색될 때마다 그 흔한 막말 한마디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절묘한 비유를 던지며 정국을 풀어갔다. JP 특유의 인상적인 수사(修辭)는 이날 추도사에 나선 충청권 대표정치인들도 한목소리로 회상할 정도였다.
정우택 부의장은 "총리는 정치를 정쟁과 각박으로 몰아가는 게 아니라 늘 여유와 여백, 유머와 해학으로 국민을 다독이며 안심시킨 나라의 든든한 기둥"이라며 "분열과 갈등이 아닌 대화와 타협으로 화합의 길을 추구한, 낭만과 품격이 있는 최고의 정치가였다. 역사가 흐를수록 국민들은 총리를 더욱 높이 평가하게 되고 아주 깊이 기리게 될 것"이라고 예찬했다.
정진석 의원도 "총리는 여유와 여백을 알고 유머와 해학을 즐겼던 향기가 나는 정치인"이라며 "상대의 흠집을 잡아 죽일듯이 달려드는 살벌한 정치판에서 총리의 여유와 여백이 그리워진다"고 말했다.
아울러 정 의원은 "총리는 몸이 불편해지시자 '이제 오른손에 힘이 안 들어가니까 골프 샷이 더 잘 받겠다'고 유머를 잃지 않으셨다"며 고인의 생전 농담을 소개했다. 이러한 농담성 일화 소개는 미국 등 선진국의 추도식에서는 빠지지 않는 절차로, 정 의원의 전언에 국회도서관 좌중에는 일시 웃음이 번졌다.
김태흠 지사는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끌고 정치적 변곡점마다 주요한 역할을 하셨으면서도 굳이 드러내지 않고 미소로 대신했던 총리는 한국현대사에 우뚝 선 진정한 거물"이라며 "촌철살인의 비유와 풍류를 담은 언어로 여백의 정치를 했던 총리의 모습, 앞으로도 항상 마음 깊이 간직하겠다"고 밝혔다.
4개 정권창출에 직·간접 관여 '거목'
이었으나…文, 서거에도 조문 외면
文정권 중 냉대 이어져…"대한민국
부정의식의 발로이자 충청 홀대"
김종필 전 총리는 박정희·노태우·김영삼·김대중정부의 창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며,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끈 역대 대통령과 정부의 공과(功過)를 긍정적으로 바라봤으나, 서거 직전에 출범한 문재인정권에 대해서는 근심을 감추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5·16 군사혁명으로 박정희정부 출범을 주도한 김 전 총리는 이후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 인내"라는 조언을 포함한 '2인자 처세술'의 전수로 노태우정부 출범을 조력했다. 이후 '3당 합당'과 민자당 대선후보 경선에서의 지지 선언으로 김영삼정부 출범의 주역이 됐으며, 'DJP연대'를 통해 첫 여야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끌어내고 김대중정부 출범의 일익을 맡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문재인정권 출범 직후로 국운에 먹구름이 드리우던 2018년 6월에 서거했다. 백기완 씨 등 '자기편' 인사의 빈소는 빠짐없이 직접 조문하며 챙기던 문 전 대통령은 헌정사 최다선이자 "대한민국 현대사 그 자체"라는 평가를 받는 김 전 총리 빈소 조문을 외면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문재인 전 대통령은 70년대 구치소에 잠깐 수감됐을 때, 자신에게 내의를 건네준 사람이라는 사소한 이유로도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빈소를 직접 조문했던 양반"이라며 "이런 문 전 대통령이 JP의 빈소를 조문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 의식의 발로이자 충청 홀대"라고 단언했다.
문재인정권 내내 김종필 전 총리의 추도식은 서울에서 거행되지 못하고 부여 가족묘원에서 치러졌다. 관계자는 "김 전 총리쯤 되는 분의 추도식이라면 그에 맞는 의전 협조가 이뤄져야 한다"며 "문정권의 냉대 탓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권교체 후 처음으로 국회서 추도식
순방 중 윤대통령도 조화 보내 예 갖춰
"돌아가시고 5년만에 처음 서울에서
…세상이 바뀌었음을 확실히 느낀다"
이날 추도식은 정권교체 이후 처음에서 서울에서 치러진 추도식이다. 특히 김 전 총리가 9선을 한 국회에서 엄수됐다. 헌정사 최초로 '충청이 뿌리'인 윤석열 대통령은 해외 순방 중이라 직접 자리하지는 못했지만,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 예의를 갖췄다.
정치적 계승자인 충청권 대표정치인들은 추도사를 통해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충청 대통령'이 나라를 바로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하며 김 전 총리의 영면을 기원했다. 김 전 총리의 추도사를 하기에 앞서 추도식이 5년만에야 국회에서 치러질 수 있게 됐다는 점을 들어 "세상이 바뀌었다"고 울컥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정우택 부의장은 "그리운 총리! 소천하던 5년 전 그 때에는 대한민국의 앞날에 먹구름이 가득하던 때"였다며 "국민들은 지난해 대선과 지방선거, 두 차례의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이 가야할 길을 다시 바로잡아주셨다"고 고했다.
그러면서 "국익외교로 한미동맹 강화, 한일관계 복원, 탈원전 폐기와 민간주도 성장기반 마련 등 외교·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며 "비정상이 됐던 대한민국을 다시 정상화하기 위한 배전의 노력을 주도하겠다"고 다짐했다.
정진석 의원은 김종필 전 총리가 주도했던 한일국교정상화의 업적을 이어받아 '제2의 한일국교정상화'를 이뤄냈음을 알렸다.
정 의원은 "김종필 총리는 한일의원연맹 초대 회장이었으며, 내가 지금 회장을 맡고 있다"며 "윤석열 대통령의 특사로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이래 한일관계 정상화에 온힘을 쏟아, 거센 비난을 무릅쓰고 한일국교정상화를 타결했던 총리의 발걸음을 따라 일본 특사를 완수할 수 있었다. 총리가 생전에 내게 들려주셨던 말씀을 충실히 따른 것"이라고 술회했다.
김태흠 지사는 "총리는 '국민을 호랑이 같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했다"며 "잠깐 얕은 수로 국민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특정 정치 세력을 겨냥해 꼬집는 말을 남겼다.
전영기 시사저널 편집국장은 약력 보고에 앞서 "김종필 총재께서 돌아가시고 5년만에 처음으로 서울 중앙에서 추도식이 열리게 됐다. 9선 의원으로 정말 누구보다도 국회를 사랑하셨던 분"이라며 "그분께서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좋으셨겠느냐. 세상이 바뀌었음을 확실히 느낀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