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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23>] 간디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2.07.20 14:06
수정 2022.07.22 09:57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23화 간디


“나도 지들처럼 이반인 줄 알았나 봐요. 혼자 왔는데 합석해도 되겠냐고 하니까 그러래요. 내가 먹던 소주와 안주를 가지고 가서 물어봤어요. 이런 거 가족들이 아시냐고. 모른대요. 그러면서 제게 되묻데요. 아저씨는 가족에게 알렸냐고.”


“그래서 뭐라 했어요?”


여주인이 크지도 않은 눈을 크게 떴다. 도반은 이미 여러 번 들었던 얘기라 무심한 듯 맥주를 홀짝거렸고 앞 탁자에선 줄기차게 노래가 이어졌다.


“나는 일반이라 그랬죠. 그러니까 표정이 싹 달라지대요. 다시 또 물어요. 이반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래서 대답해 줬죠. 나는 죽어도 이반이 될 수는 없지만 당신들을 이해한다고. 이게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선천적인 성격에 기인한 것이란 걸 안다고. 하지만 이반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하데요. 일반인들은 우리를 모른다고. 그만 당신 자리로 돌아가시라고. 그래서 나는 혼자서 소주 한 병을 더 마시고 포장마차 나올 땐 호모들 술값까지 계산해 주었죠.”


“뭐 하러 그것들까지 계산해 줬어요?”


여주인이 이반들에 대한 원초적인 반감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목에 핏대를 올렸다. 나는 소주 한 잔에 산낙지 한 점을 집어 먹으며 천천히 말했다.


“우리는 휴머니스트입니다. 걔들이 호모라고 사람 아닌 건 아니잖아요. 조카 같은 애들이라서 어찌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그건 선천성이니까. 그냥 마음이 착잡해서 그랬어요.”


“우리 이 기사님 보니까 같이 오는 사람들과는 수준이 다르다 싶더니….”

여주인이 건배를 청해 왔다. 우리는 잔을 들어 깨끗하게 비워버렸다. 여주인이 빈 잔을 채워주며 말을 이었다.


“술도 점잖게 마시고, 말하는 거 보면 수준도 높아 보이고.”


“이 친구가 시인이잖아요.”


“시인은 무슨, 나 지금은 시 안 써요.”


내 말에 화들짝 놀라며 도반이 손사래를 쳤다. 나는 도반에 대한 칭찬 서너 가지를, 가령 행실이 바르다거나 의리가 있다거나 인정이 많다거나 무엇보다도 결국 나중엔 뛰어난 시인이 될 것이라는, 여하튼 좋은 말들을 골라 여주인에게 알려주었다. 여주인은 내가 말하는 내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표해 주었다. 그렇게 여주인의 호의와 후의와 지원에 힘입어 오후 네 시경 유쾌하게 술자리를 마칠 수 있었다.


천전시장을 나와 택시를 잡느라 땡볕에 잠시 서 있었더니 택시를 타자마자 내 몸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져서 영영 못 일어난다한들 하등 이상할 것 없을 만큼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도반의 옥탑방까지 어떻게 올라갔는지 모를 정도로 비몽사몽간에 나는 그대로 엎어져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보니 저녁 일곱 시였다. 휴대폰을 열어보았지만 부재중 전화는 한 통도 와 있지 않았다. 아까 낮에 아내와 통화한 기억이 있으니 내가 대낮부터 취해 있다는 걸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휴대폰 상으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나는 궁금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해서 먼저 아내의 휴대폰으로 문자를 넣었다. ‘고행 중이니 내 걱정은 하지마라.’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아내는 내 걱정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시 문자를 넣었다. 역시 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정우에게 문자를 넣었다. 마찬가지였다. 다시 아내와 아들에게 동시 문자를 발송했다.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


도반이 어느새 침대에서 일어나 안경을 쓰고 앉아있었다. 저녁 일곱 시 삼십 분경이었지만 아직 환한 빛이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옥탑방은 여전히 찜통이었고 선풍기는 쉴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집에서 기다린다. 어서 들어가. 내일 출근해야지.”


“알았어, 알았어.”


“연락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미련한 짓이야. 그전에 들어가.”


문득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습으로 도반이 앉아 있었다. 머리숱이 없고 안경을 쓰고 웃통을 벗고 결정적으로 비쩍 마른 몸과 갸름한 얼굴. 나는 거기까지만 생각을 하고 다시 한 번 아내와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걱정마라. 나는 지금 고행 중이다.’


“정신 좀 차리게 아이스크림 하나 사올까?”


“됐네.”


나는 방바닥에 드러누운 채 휴대폰만 눈알이 빠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도반을 올려다보았다. 도반이 나의 속내를 알고 있다는 듯 빙긋 웃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 싶더니 비로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 찜통 같은 무더위에 비록 물레를 돌리고 있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도반은 비폭력 평화주의자 마하트마 간디를 빼닮아 있었다.


나는 무척 부끄러웠다. 음주수행 용맹정진을 입으로만 지껄였지 지금의 내 모습은 고민과 걱정에 사로잡힌 시중의 장삼이사에 불과했다. 수행이란 게 고통스럽다고 호들갑 떨지 않으며 기분 좋다고 오버하지 말아야 했다. 감정의 기복 따위는 없이 언제나 장강의 물처럼 늠름하고 당당하게 흘러야 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자중자애를 넘어 화이부동(和而不同), 이타(利他)의 세계로 나아가야 했다.


비록 음주수행에 갓 입문한 신출내기라고 해도 수행과정의 전․중․후가 완만한 곡선을 그려야 함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극에서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에 반해 도반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수행의 전․중․후를 지나오면서 커다란 호수에 돌 하나 던진 것처럼 잠시 파문이 일었을 뿐이었다. 소중한 가정과 목숨과도 같은 두 아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도반은 열악한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용맹하게 정진했던 것이었다. 도반은, 다시 한 번 더 유심히 봤더니 얼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간디를 똑 닮아 있었다.


“연락 오기 전에 들어가라니깐.”


간디의 채근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이 옥탑방 안으로 길게 들어왔고 서늘한 바람이 내내 옥상을 맴돌았다. 명현반응인가. 오한에 몸살이 날 것처럼 온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얼른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구쳤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꼭 껴안아보고도 싶어졌다. 나는 간디의 배웅을 받으며 옥탑방을 벗어나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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