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22>] 낮술 소나타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2.07.15 14:01
수정 2022.07.15 10:55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22화 낮술 소나타


어렵게 구입한 막걸리 한 통을 금방 다 비우고 우리는 무겁고 칙칙한 얼굴로 해장국집을 나섰다. 아직 초여름에 불과했지만 기승을 부리고 있는 무더위는 한여름을 방불했다. 얼마나 뜨거운지 목덜미가 물파스를 바른 듯 따가울 지경이었다. 도반의 모텔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도 후줄근하게 땀이 흘렀다. 우리는 등산하듯 계단을 올라 옥탑방에 들어섰다.

찜통이 따로 없었다. 선풍기를 최강으로 돌리며 방에 드러누워서는 다음 일정을 구상했다. 고행은 어차피 만행과 함께일 때 제대로 열매 맺는 법이었다. 하지만 만행을 다니기엔 가장 중요한 총알이 없었다. 둘 다 빈총만을 차고 드러누운 꼴이었다.


“총알이 더도 덜도 말고 삼만 원만 있으면 딱 좋으련만.”


“감사할 따름이지.”


내 말에 도반이 침대에서 고개를 번쩍 들며 화답했다. 어제 사납금 채우고 조금 남은 돈은 선술집 외상값을 갚아버렸고 오늘은 비번이라 돈 나올 구멍이 없었다. 내일 택시영업하면서 현금 손님을 받으면 그 수입으로 밥도 먹고 커피도 먹고 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보급로를 어디로 정할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주위에 있는 지인에게 전화를 하자니 무슨 일인가 싶어 당장 달려올 것만 같고, 그러면 내 몰골이 노출될 우려가 있었다. 아직까지 음주수행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일반인의 시각에 비쳐지는 도반과 나는 그저 볼썽사나운 술꾼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서울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낮술 마셔야 하는데 돈이 떨어졌다. 삼만 원만 부쳐다오.”


“오만 원, 오만 원.”


도반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죽여서 고함을 쳤다. 이것은 소리 없는 오만 원짜리 아우성인가. 눈앞에 문득 ‘유치환의 깃발’이 나부끼는 느낌을 절실하게 받으며 나는 즉시 고쳐 말했다. 오만 원이라고.


휴대폰 문자로 도반의 계좌번호를 알려주고 우리는 옥탑방을 나섰다. 흑과 백처럼 볕과 그늘이 선명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볕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우리는 무더위를 피해 그늘로 찾아다니며 농협에 갔다. 썩을 놈, 낮술 한잔 주지 않고 술값만 부치라하냐. 서울친구에게서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그만 문자를 씹고 말았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듯 오만 원을 인출했다.


“회사 사람들과 천전시장 안에 가끔 가는 데가 있는데 거기 갈까?”


도반이 말했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뜨거운 햇빛에 취기가 잔뜩 올라 얼굴이 홍당무처럼 부풀어 있었다. 이제 진정한 고행과 만행 길에 들어서는 것인데 외모야 아무려면 어떠냐 싶었다. 우리는 택시를 탔다.


도반이 앞장서서 들어간 곳은 단칸방만한 크기의 방석집이었다. 여느 술집처럼 탁자에 의자가 있는 게 아니라 방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야 했다. 실내엔 이미 한 팀이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칠십대 남성 한 명과 오륙십대 여성 세 명이었다. 마른안주에 맥주 몇 병을 놓고 젓가락 장단에 맞춰 ‘애수의 소야곡’을 구성지게 부르고 있었다. 애수의 소야곡은 일제 강점기인 1937년 말에 발표된 트로트 곡으로 박시춘이 작곡하고 남인수가 부른 노래다. 강주 출신의 가요황제 남인수는 훗날 박시춘과 함께 일제강점기 대중음악계의 대표적인 친일인사가 된다.


우리가 들어서자 가장 젊어 보이는 오십대 중반의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반가워하는 얼굴로 도반에게 알은체를 하더니 커다란 덩치를 움직여 우리가 앉은 탁자로 건너왔다. 손님들은 애수의 소야곡을 마저 부르고 있었다. 젓가락 장단에 점점 흥과 힘이 실렸다. 사십대 남성들의 출현으로 육십대 여성들이 한껏 고무된 표정이었다.


“뭐 드실래요?”


“맥주 두병, 소주 하나요. 그리고 안주는 뭐 하지?”


도반이 물었고 나는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산낙지가 눈에 띄었다. 한 접시 이만 원이었다.


“산낙지 한 접시는 많으니 반 접시만 하면 안 될까요?”


“무조건 한 접시 하셔야 해요.”


“그래, 여기서 장만하는 게 아니라 다른 집에서 사와야 하니까 그냥 한 접시 시켜.”


도반이 상남자처럼 호기롭게 외쳤지만 나는 잠시 망설였다. 반 접시도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먹지도 못할 안주거리에 괜히 아까운 총알을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젊은 사람들. 늙은이들이 주책없게 떠들어서 미안합니다.”


애수의 소야곡을 끝까지 부르고 나서 일행 중의 한 명이 말했다. 육십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나는 괜찮다든지, 아니면 잘 들었다든지 대답을 하려다가 마침 TV에서 어느 가수가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부르기에 나도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비 내리는 고모령은 군국가요를 작곡하여 일제에 협력한 박시춘이 해방 후 발표한 노래로 현인이 불렀다.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느닷없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에 어르신들이 함께 박자를 맞추며 추임새를 넣었다. 읏~쌋싸.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날~밤이 그리웁~고나.”

방석집은 즉석 공연장이 되어 버렸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앵콜! 앵콜!”


아까 미안하다던 육십대 여성의 요청이었다. 나는 정중히 거절하고 여주인에게 산낙지 한 접시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어르신들이 앵콜 거절에 아쉬워하더니 이내 젓가락을 두드리며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여주인이 산낙지 한 접시를 들고 나타나자 나는 어르신들에게 반 접시를 덜어드리라고 말했다. 어르신들이 고맙다며 우리 탁자에 맥주 한 병을 제공해 주었다. 불현듯 술자리 이웃 간 훈훈한 정이 넘쳐났다.


“이 기사님도 남다르다 싶더니 친구 분도 정이 참 많으시군요.”


여주인이 말하자 도반이 부연설명을 넣었다.


“그럼요. 술 한 잔 마시면 베푸는 걸 좋아하죠. 일전에 서울에서 밤늦게 종로 어딘가 포장마

차에 혼자 간 적이 있었대요. 그런데 거기가 글쎄 호모들 아지트였다나? 즐비한 포장마차 전부 이반들 차지였던 거죠. 주인장이 처음엔 이 친구도 동성애자인가 생각했대요. 거긴 일반인들은 출입을 안 하는 데니까. 오죽하면 낯가리는 직업인 배우들도 오는 그런 데겠어요.”

도반의 말을 받아 당사자인 내가 직접 나섰다.


“옆에 보니까 남자 대학생 둘이 술을 먹고 있는 거예요. 탁자에 앉아 있는데 둘이 마주보는 게 아니라 마치 남녀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거예요. 포장마차 주인에게 저 사람들도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거예요. 둘이 있는 테이블로 가 맞은편에 앉았죠.”


“아무 소리 안하던가요?”


생소한 이야기에 여주인이 호기심을 보였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