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인디그라운드(91)] 박지하가 찾아낸, 소리의 조각들
입력 2022.03.02 13:15
수정 2022.03.02 13:15
'더 글림' 2월 25일 발매
작곡가 겸 국악기 연주자 박지하가 지난달 25일 독일 음반사 글리터비트(tak:til, Glitterbeat)를 통해 새 앨범 ‘더 글림’(The Gleam)을 발매했다. 하루 종일 인간과 시시각각 다른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빛의 다양한 형태를 그린 이 앨범은, 빛의 개념에서 출발한 다양한 소리의 조각이 담겼다. ‘글림’이라는 제목 역시 어디에 반사된 어슴푸레한 빛이라는 뜻이다.
2008년부터 2016년까지 그룹 ‘숨’[suːm]의 리더이자 프로듀서로 활약한 그는 2016년 11월 정규 1집 ‘커뮤니언’(Communion)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피리, 생황, 양금 등 국악기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소리에 주목하는 멀티플레이어로 통한다. 전통음악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처음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될까요?
어렸을 때 집에서 부모님이 음악을 많이 들으셔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좋아했어요. 처음 음악을 시작하게 된 건 누구나와 비슷하게 매우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우면서였어요. 근데 저랑은 잘 맞지 않아서 피아노는 조금 배우다 말았고, 그 뒤로 플루트를 배우고, 성당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것도 좋아했어요. 그냥 음악을 좋아했던 건데 부모님의 소개로 국립국악학교 라는 학교를 알게 되었고, 입학하게 되면서 전통악기인 피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후 대학교 졸업 때까지 쭉 피리를 전공하며 음악을 하게 됐습니다.
-음악이 업이 된 이후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학교에서는 뭔가 배워서 하는 음악을 하고 있었다면, 음악이 직업이 되면서는 저만의 소리와 이야기를 찾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쉽게 말하면 점점 더 제 맘대로, 자유롭게 음악을 하게 됐다는 점이 달라졌어요.
-음악을 하면서 슬럼프도 있었나요?
항상 슬럼프를 이겨내는 중인 것 같아요. 하하. 예전에 더 어렸을 때는 뚜렷하게 정말 음악이 하기 싫어서 ‘나 슬럼프인가?’ 하는 기간도 있었는데, 지금은 음악이 너무 삶의 일부가 되어서 그냥 하기 싫으면 좀 게으르게 하고, 또 하고 싶으면 저도 모르게 초인적으로(?) 집중해서 하게 되고 그래요. 그래서 딱히 이겨낸다기 보다는 삶의 일부가 되어서 언젠가는 저도 모르게 결국에는 하고 있는 그런 것이 음악인 것 같아요.
-새 앨범 ‘더 글림’은 어떤 앨범인가요.
큰 테마는 ‘빛’을 주제로한 음반인데, 궁극적으로는 아름답고 조화로운 소리들을 발견하고, 찾고, 발전시키는 일련의 과정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음반입니다.
-‘빛’의 다양한 형태를 담았다고 했는데요, 이번 앨범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빛의 형태는 어떤 것들인가요?
특정한 어떤 빛의 형태를 보여준다기 보다는, 희미한 빛의 조각과 그러한 소리들에서 시작되어 음악이 만들어지고 그 소리와 빛이 점점 쌓여감에 따라 어떤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음반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빛을 소리로 표현함에 있어서 어떤 부분에 가장 중점을 뒀나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빛의 형태나 세기도 달라지고, 하루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가 빛이기도 하잖아요. 그런 하루 동안의 시간의 흐름과 빛이 변화하는 분위기를 음반에 담고 싶었고, 그래서 음반의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한번 들어보시기를 권해봅니다.
-타이틀곡과 메인타이틀곡을 각각 ‘선라이즈: 어 송 오브 투 휴먼스’와 ‘라이트 웨이’로 선정한 이유가 있다면요?
뭐라고 명확히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조금 더 애착이 가고 만들면서 개인적으로 좋았던 곡들이어서 그렇게 정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음악적으로 조금 일반적이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서 그 두 곡에 조금 더 마음이 가는 것 같아요.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 정확히 어떤 부분일까요?
모든 곡을 다 아끼지만, ‘선라이즈: 어 송 오브 투 휴먼스’가 가장 마음에 많이 남더라고요. 매우 천천히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곡인데, 여러 가지 이미지가 많이 떠오르고 작업과정도 다양한 방식을 거쳤던 곡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 남산 피크닉에서 있었던 무성영화 극장 공연을 하면서 동명의 흑백 무성 영화에 음악을 만들게 되면서 만들게 된 곡인데, 영화의 장면 장면들에서 조금씩 얻었던 소스들을 나중에 음반에 수록 하게 되면서 좀 더 발전시키고 하나의 곡 형태로 만들게 된 곡입니다.
-각각의 수록곡들에 대한 설명도 해주세요.
저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곡을 만들고 음반을 구성하면서 제목에 최대한 에센스를 담으려고 하기 때문에 제가 한곡, 한곡 설명 드리는 것 보다는 각곡의 제목과 음반의 흐름을 보시면 곡을 듣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제목이나, 흐름 등에 전혀 상관없이 음악만 들으셔도 좋습니다. 저는 각자의 저와는 다른 해석도 좋고, 다양한 이야기 들을 수 있다면 더 재미있거든요.
-앨범 작업 과정도 궁금합니다.
모든 과정을 거의 다 두 번씩 한 것 같아요. 마음에 들지 않아서(웃음). 녹음도 두 번, 믹싱도 두 번, 사진 작업도 두 번. 그만큼 제가 원했던 게 강하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결과물에 대한 욕심도 있었던 것 같고요. 아무튼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었어요. 이런 과정들 덕분에 조금 더 배우고 성장한 것 같기도 하고요. 스트레스도 많았지만요. 하하.
-앨범을 만들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요?
사실 음반 작업은 작년 6월에 다 마무리가 되었는데, 독일 레이블에서 발매하는 음반이어서 유럽에서 LP 프레싱을 했어야 헀어요. 그런데 작년에 유럽 LP 프레싱 대란(?)이 일어나면서, 음반 발매 시기가 많이 늦춰졌고 그걸 기다리는 과정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해를 넘기고 음반이 나오게 됐으니까요.
-음악을 악기로 표현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소리의 질감, 조화. 악기를 처음 배웠을 때 바람직하다고 배웠던 전통악기가 갖고 있는 전형적인 소리도 좋지만 제가 낼 수 있고, 제가 연주하기 편한 소리를 찾아서 음악을 만들어요. 기술적인 연주력이나 기교 부분에 집중하기 보다는, 소리적인 차원에서 제가 연주하는 악기들을 대하고 그런 접근 방식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고 있고요.
-여러 악기를 다룬다는 것이 곡을 만들 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피리, 생황, 양금을 주로 연주하는데요, 악기를 여러 개 다룬다는 것을 내세우고 싶거나, 또 다른 악기를 더 연주하고 싶거나 하는 욕심은 없어요. 그냥 지금 하고 있는 악기들은 학교 교과과정을 통해 배웠거나, 예전에 듀오 활동을 할 때 계기가 되어 독학으로 배우게 된 것 뿐이고, 어찌되었건 연주를 하게 됐으니까 잘 활용했으면 좋겠어서 제가 할 수 있는 악기를 곡에 맞게 잘 사용해서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악기를 여러 개 한다기 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에서 더 다양한 소리들을 찾고 싶은 게 더 저한테는 맞는 것 같아요.
-이번 프로젝트의 일부는 한국 원주 뮤지엄 산 내 안도 다다오가 건축한 명상관에서 열린 공연을 위해 만들어졌다고요.
문화공간과 협력하여 공연을 할 기회가 생겼는데, 제 음악과 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찾던 중에 뮤지엄 산 명상관에서 공연을 기획하게 되었어요. 코로나19 때문에 관객을 많이 받지도 못했고 공연도 좀 아쉬웠는데, 그때 그 공간에서의 작업과 경험은 제 기억에 많이 남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의 작업을 조금 더 발전시켜서 음반의 일부로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시도, 협업 등 다양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는데 평소에도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인가요?
두려움 많아요(웃음). 특히 음악적 성격을 잘 모르겠는, 다른 아티스트랑 콜라보레이션 공연을 했으면 좋겠다는 식의 기획이 올 때면 정말 불편하고요. 하하. 하지만 올해도 도전은 계속됩니다. 올해 음반이 하나 더 나올 예정인데요. 예전에 영국 BBC 라디오 방송 Late Junction 프로그램 에서 영국 아티스트인 Roy Claire Potter와 함께 즉흥 연주했었던 음원이 영국 Cafe OTO의 레이블 OTOROKU를 통해서 발매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3월 29일 런던과, 31일 글래스고에서 Roy와 함께 라이브 공연도 예정되어 있고요.
-이번 앨범이 박지하 씨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요?
제 삶의 기록 중에 또 하나가 되겠죠. 2021~2022년 그 즈음에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이런 에너지를 갖고 있었고, 그때의 나는 그랬구나 하고요. 제가 제일 잘 보이는 게 음반인 것 같아요.
-박지하 씨의 음악만이 가진 차별점이라면요?
감정이 많이 담겨있고, 선율이 분명하고, 반복적이고, 호흡 안에 리듬이 숨겨져 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앞으로 어떤 음악을 보여줄지, 박지하 님의 음악적 방향성도 궁금합니다.
제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제 음악도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어떤 음악을 하던지 성의껏 정성 들여서 제 음악을 만들고 싶고, 제 삶도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혹시 올해 계획된 일정들이 있나요?
가까이는 3월에 미국 SXSW에서 쇼케이스가 있고, 영국에서 솔로 공연과, 앞에서 이야기 했던 Roy Claire Potter와의 공연이 있고요. 6월에 독일에서의 공연, 10월 미국투어, 11~12월에 유럽 투어 공연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한국에서도 단독공연을 한번은 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마지막으로, 대중에게 어떤 사람으로 불리고 싶은가요?
꾸준히 천천히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