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없는 동행보다는 혼자 걷는 게 낫다
입력 2022.02.28 07:59
수정 2022.02.28 08:00
과장된 분노에는 저의가 있다
결렬 통보 다른 배경 있었나?
10년 숙련공의 식언·거래 기술
“처참하게 무시당했다.”
야권후보 단일화 결렬과 관련,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가 27일 기자들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처참하게 무시당하는’게 어떤 것인지는 짐작이 되지 않는다. 아무려면 단일화 파트너를 그렇게까지 대했겠느냐는 생각은 들지만 내막을 모르니 추측 자체가 안 된다.
과장된 분노에는 저의가 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는 확인된 듯하다. 안 후보가 윤 후보와 단일화를 않기로 결정한 이유다. ‘처참한 무시’가 결정적 요인이 되었음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모욕감을 감내해가면서 계속 추진해야 할 만큼 ‘단일화’라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아니라는 판단이 내포된 말이다. 물론 사람은 감정을 가진 동물이다. 감정이 이성보다 더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행동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안 후보의 결렬 선언을 이상하게 볼 까닭은 없다. 과장된 듯 한 분노의 배경이 궁금하긴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안 후보는 자신이 ‘단일화’를 꺼냈을 때 ‘정권교체’에 대한 공적인 의무감 혹은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적인 감정으로 좌지우지 될 과제에 공적인 의미와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결례일 것이다.
안 후보는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대선 포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했었다. 그러나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에게 단일화 경선에서 지고 말았다. 이후에 계속된 국민의힘과의 합당 협상도 실패로 끝났다. 어쩌면 그 때 이미 대선 출마의 구도는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국민의힘과 합당할 경우 대선 후보가 되기는 지난(至難)한 과제가 된다. 짱짱한 경쟁자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국민의당을 계속 이끌면 후보 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 된다.
‘대선 포기 선언’에 구애될 일은 아니었다. 한국의 정치인이라면 그런 정도는 아주 우습게 여기도록 학습이 돼 있다고 봐야 한다. ‘새정치’ ‘정치교체’의 기치를 내건 안 후보도 이 점에서는 구태와 타협을 아주 쉽게 한 인상이다.
1992년 세 번째로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만약 이번에도 떨어지면 또 나올 것이냐”는 질문에 “국민들이 뭐라고 하겠느냐”며 단호히 부정했다. 그는 또 낙선했다. 눈물을 보이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당도 광주도 국민도 목메인 ‘고별’, ‘거인’ 퇴장하다”(1992. 12. 20. 조선일보 1면 톱 기사 제목). 모든 언론들이 온갖 미사여구를 곁들여 그 ‘거인’을 배웅했다. 찬사가 쏟아졌다. 그는 이듬해 1월 영국 유학을 떠났다가 6개월 후 귀국했다. 정치는 절대로 안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으나 95년 7월 신당(새정치국민회의)을 창당하고, 이를 발판으로 네 번째 도전을 감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직에 올랐다.
결렬 통보 다른 배경 있었나?
안 후보가 김 전 대통령을 롤 모델로 삼은 것일까? 끈질기게 도전하면 언젠가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선거가 그 기회이지 말라는 법도 없다. 안되더라도 실패는 성공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단일화를 추진해 봐야 남 좋은 일 시켜줄 위험성이 크다. 완주를 할 경우 낙선하더라도 판을 뒤흔들어 ‘안철수의 힘’을 정치권과 국민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효과는 기대 가능하다.
윤-안 단일화 결렬은 안 후보가 기대했든 안 했든 이재명 후보와 더불어민주당엔 축복이다. 간절히 소망하던 바가 이뤄졌다고 하겠다. 이 후보는 25일 TV토론 때 각별히 안 후보를 챙기는 화법을 구사했다. 안 후보가 완주만 해준다면 야권의 분열로 이 후보가 이긴다고 계산했을 것이다.
민주당은 이미 그 전날 송영길 대표가 나서서 정치개혁안을 발표했다. 핵심 내용은 △대통령 4년 중임제 △결선투표제 △연동형 비례대표제 △위성정당 금지 △지방선거 중대선거구제 △여야정 정책협력위원회 △국무총리 국회 추천제 등이다. 이 모든 것은 안 후보가 주장해 왔던 것이기도 하다. 당연히 관련법 제·개정이 전제된다. 국민의힘은 못주지만 172석의 거대 민주당은 줄 수 있는 보상이다.
안 후보는 TV토론에서 이 후보가 이 같은 정치개혁안을 제시하자 “제가 그 당 내부사정을 다른 분에 비해 비교적 잘 아는 편이긴 한데 과연 의원총회를 통과할 것인가, 저는 그게 key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 후보는 의총에서 결정될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민주당은 27일 저녁 긴급 의원총회를 열어 이를 포괄적으로 추인했다. 민주당 의총이 이날 통과시킨 ‘국민통합 정치개혁을 위한 의원 결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개혁에 인생을 바쳤고, 안철수의 새로운 정치, 심상정의 진보정치, 김동연의 새로운 물결도 같은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의힘 윤 후보 포위망 구축을 선언한 것이다.
이에 앞서 윤-안 후보 측의 전권 대리인들이 27일 새벽까지 논의해서 합의했고, 그 내용이 두 후보에게 보고됐다. 이제 후보 간 회동 일정 조율만 남은 상태에서 안 후보가 오전 9시 목포 유세를 떠나며 결렬을 통보했다. 윤 후보가 오후 1시 긴급 기자회견에서 그렇게 밝혔다. 그렇다면 새벽 4시에서 아침 9시까지 사이에 어떤 돌발변수가 등장했다는 뜻이다. 그것이 민주당의 ‘구체적 보상 방안’이었을 개연성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10년 숙련공의 식언·거래 기술
안 후보는 ‘전권 대리인’이라는 개념은 없었다고 했다. 이태규 당 총괄선대본부장은 상대편에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듣기로 한 것일 뿐이었고 결렬 통보 이유는 ‘고려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민의당 이 본부장은 윤 후보가 협상 전말을 밝힌 데 대해 “자신들의 책임 회피를 위해서는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신뢰하기 어려운 세력”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런데 실컷 이야기하고 나서 갑자기 결렬을 통보한 측에서 윤 후보의 회견에 대해 ‘신뢰’ 운운하는 것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상황의 변화 추이를 보건대 윤-안 단일화는 물 건너갔다고 보는 게 옳겠다. 안 후보 측에 더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을 개연성이 높다. 단일화 부담을 털어내는데다 가외로 원하던 바도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정권교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하곤 했지만 최근엔 “주술 씌인 듯 마법에 걸린 듯 정권교체만 되면 다 된다는 건 착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굳이 국민의힘과 연대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이겠다.
정치를 10여년 했다고 자랑하더니 거래에 자신감이 붙은 모양이다. 식언(食言)의 기술에 거래의 기술까지 보태지면 명실상부한 한국적 정치인 반열에 오르는 셈인가?
윤 후보 측도 한심하다. 단일화를 간절히 바란다면서도 당내에선 거의 날마다 말의 혼선을 빚었다. 게다가 간절함도 있어 보이지 않았다. 자유우파 국민들 사이에서 후보 단일화 요구가 거세게 일자 마지못해 제안을 하는 듯 한 모습이었다. 준비가 충분하지도, 접근방식이 치밀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뒤통수를 세게 맞고 말았다. 그것도 몇 차례나 윤 후보가 안 후보에게 직접 당했으니 협상을 이어갈 여지가 아예 없어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 이상 기대할 바 못 된다면 ‘단일화 없는 승리’로 ‘정권교체’를 이루는 길만이 남아 있다. 사실 이미 출마한 후보를 포기시킨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 된다. 단일화가 반드시 승리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묘책인 것도 아니다. 안 후보는 중도 우파의 표 뿐 만 아니라 중도 좌파의 표도 잠식할 것이다. 어느 쪽 손실이 클지는 개표를 해봐야 안다. 미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한 사람의 유권자라도 더 만나는 게 낫다.
표는 안 후보가 주는 게 아니라 유권자가 준다. 이보다 더 명료한 이치가 있는가?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