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빨리 떠난 유상철…이렇게 기억 된다
입력 2021.06.08 07:30
수정 2021.06.08 13:38
췌장암 투병 1년 8개월, 건강 악화로 눈 감아
최고의 멀티플레이어, 한일월드컵 4강 영웅
‘2002 한일월드컵 영웅’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결국 세상을 등졌다. 향년 50세.
인천 구단은 췌장암 투병 중이던 유 전 감독은 7일 오후 서울 아산병원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유 전 감독은 인천 감독 시절이던 지난 2019년 10월 황달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고 이듬해 2월 인천의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병마와 싸워 극복하기로 마음먹은 고인은 이후 13차례에 걸친 항암 치료를 이겨내며 병세가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중순부터는 방송에 출연하고 언론 인터뷰에 나서는 등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올해 1월 두통을 호소했고 안타깝게도 뇌 쪽으로 암세포가 전이돼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결국 “잘 이겨내 다시 운동장에 서겠다”고 다짐했던 말을 지키지 못하고 투병 1년 8개월여 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비록 세상을 떠났으나 유 전 감독이 한국 축구에 남긴 업적과 발자취는 상당하다.
경신중, 경신고, 건국대를 거쳐 1994년 현대 호랑이(현 울산 현대)에 입단한 유상철은 한국 축구 최고의 멀티플레이어로 기억된다. 실제로 유상철은 공격수부터 미드필더, 수비수, 심지어 측면 수비수까지 두루 거쳤고, 말 그대로 골키퍼 빼고 모든 포지션을 소화한 선수였다.
실제로 유상철은 1994년에는 수비수로, 1998년에는 미드필더, 2002년에는 공격수로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된 바 있다. 3개 필드플레이 포지션에서 베스트 11에 오른 선수는 유상철과 또 다른 레전드 김주성뿐이다. 심지어 유상철은 1998년 K리그 득점왕까지 거머쥐며 자신의 다재다능함을 뽐내기도 했다.
쓰임새가 매우 요긴했던 유상철은 국가대표에서도 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994년 3월 미국전을 통해 데뷔전을 치른 유상철은 A매치만 124경기를 뛰며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 벨기에와의 최종전에서 투지를 불사른 동점골을 넣었고 4년 뒤 2002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에서는 한국 축구의 사상 첫 승리를 확정짓는 쐐기골을 성공시킨 바 있다. 득점 때마다 두 팔을 벌려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내는 골 세리머니가 기억된다.
뛰어난 기량은 일본 J리그에서도 탐 냈고 한일월드컵을 전후해 요코하마 마리노스, 가시와 레이솔 등에서 뛰며 한국 축구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특히 유상철을 품고 J리그 2연패를 달성했던 요코하마는 고인이 투병 중일 때 경기장에 응원 현수막을 걸어 눈길을 끌었다.
2006년 현역에서 은퇴한 유상철은 KBS 예능프로그램 ‘날아라 슛돌이’ 팀의 감독을 맡으며 재능기부에 나섰다. 이때 지도한 이강인은 한국 축구의 미래를 이끌어갈 선수로 성장했고 최근 유 감독과 만나 “다시 한 번 가르침을 받고 싶다”며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2009년 춘천기계공고 감독을 시작으로 대전시티즌, 울산대학교, 전남드래곤즈 사령탑을 거쳐 2019년 인천의 지휘봉을 잡으며 또 다른 전설을 써내려갔다. 2부 리그로 강등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빠르게 팀을 수습한 유 감독은 결국 인천의 1부 리그 잔류를 이끌어냈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