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원톱’도 문제없다…무대 중심에 선 ‘여성 서사’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09.05 08:55
수정 2025.09.05 08:56

공연계에 여성이 중심이 되는 작품들이 잇따라 무대에 오르는 흐름을 넘어, 이제는 단 한 명의 여성 배우가 120분을 책임지는 작품까지 등장하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남성 배우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무대 문법은 깨지고, 여성 배우들의 목소리와 몸짓이 무대를 가득 채우며 새로운 흥행 공식을 써 내려가고 있다.


'프리마 파시' 김신록 ⓒ쇼노트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는 지난달 27일 한국 초연을 시작한 연극 ‘프리마 파시’가 있다. 작품은 성폭행 피해자가 된 변호사 테사의 이야기를 다루며, 단 한 명의 배우가 무대에 올라 모든 상황을 진술하고 재현하는 강도 높은 1인극이다.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전 회차 매진을 기록하고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즈와 토니어워즈를 휩쓴 이 작품의 등장은 한국 공연계에 여성 서사의 힘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과거 공연계에서 여성은 남성 주인공의 서사를 보조하는 역할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남성의 역할에 여성 배우가 캐스팅되는 ‘젠더 프리’ 형식이 주목받기도 했지만 온전히 여성 배우들로만 구성되어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뮤지컬 ‘마리퀴리’ ‘레드북’ ‘로제타’ ‘호프’ ‘프리다’ ‘베르나르다 알바’ ‘리지’ 등 주체적인 여성의 삶과 연대를 조명한 작품들이 연이어 무대에 오르며 대중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이는 단순히 작품의 특성을 넘어, 여성 서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대중적 수요가 그만큼 높아졌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는 “남성 중심의 공연이 주류를 이루다가 젠더적으로 다변화되었고, 특히 2018년 미투 사건 이후에는 여성이 중심에 놓이는 서사가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그는 “주체성과 타자성에 대한 탐구, 예를 들어 뮤지컬 ‘호프’와 같이 ‘나 자신이 우주’와 관련된 주체가 굵직한 주류를 이루는 식”으로 여성 서사가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호프’는 78세 여성 ‘에바 호프’가 현대 문학의 거장인 아버지의 미발표 원고를 평생 지켜온 과정을 그리며, 한 여성의 삶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정체성을 탐구해 큰 울림을 줬다.


여성 서사의 약진은 특히 중소극장에서 두드러진다. 창작 뮤지컬의 산실인 대학로에서는 여성 배우들로만 무대를 채운 작품들이 연이어 성공 사례를 만들어내고 있다. 19세기 영국,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편견에 맞서야 했던 ‘안나’가 신여성들의 연대를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레드북’은 “이 시대를 위한 뮤지컬”이라는 호평 속 이례적인 흥행을 기록했다. 특히 여성 관객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여성 서사의 힘을 증명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최승연 평론가는 이러한 흐름이 “중소극장 창작뮤지컬은 남성 배우들의 전유물이었던 2~3인극을 여성 배우로 채우는 기획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단순히 성별만 바꾼 캐스팅을 넘어, 여성 간의 깊은 유대를 의미하는 ‘시스맨스(sismance)’나 레즈비언 서사로까지 다변화되며 이야기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크로스 젠더 액팅, 더 나아가 젠더 벤딩 공연들이 확장되며 여성 배우들의 젠더 수행이 ‘대표 불가능성, 젠더 불안정성, 모호성과 이중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여성 배우들이 단순히 정해진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을 넘어, 젠더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무대 위 여성들은 더 이상 누군가의 연인이나 어머니에 머무르지 않는다. 과학자(‘마리퀴리’), 작가(‘레드북’), 혁명가(‘프리다’)가 되어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서로 연대하며(‘베르나르다 알바’), 때로는 세상의 부조리에 강렬하게 저항한다(‘리지’). 한 명의 배우가 무대를 꽉 채우는 ‘프리마파시’의 등장까지, 여성 서사는 이제 공연계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 섰다. 이들이 들려주는 다채롭고 힘 있는 목소리는 앞으로 한국 공연계 지형을 더욱 풍성하고 역동적으로 바꿔나갈 것으로 보인다.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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