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발진 공포, 누가 조장하나…페달 블랙박스 마케팅?
입력 2024.09.11 12:55
수정 2024.09.11 12:55
국과수, 5년간 급발진 의심사고 모두 페달 오조작이 원인
급발진 주장해온 명장‧전문가, 직간접적으로 페달 블랙박스 사업 벌여
의도치 않는 급가속시 '밟고 있는 페달에서 발을 떼라' 인식 확산돼야
'80대 운전자가 몰던 승용차 OO로 돌진…급발진 주장'
신문 사회면에 종종 등장하는 기사 제목이다. 고령 운전자의 페달 조작 실수가 사고로 이어지는 일이 잦지만, 구체적인 조사에 들어가기 전에 운전자가 급발진부터 주장하는 게 일상화돼 있다. 물론 연령 불문하고 상황은 비슷하다.
‘급발진 호소인’들은 많지만 사고 원인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정부기관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조사 결과는 그들의 호소와는 달랐다.
11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권영진 의원실에 따르면, 국과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 5년간 분석한 급발진 의심 사고 원인은 모두 페달 오조작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과수가 제출한 ‘최근 5년간 급발진 의심 사고 분석 현황’을 보면 2020년부터 올 6월까지 총 364건의 급발진 의심 신고가 접수됐다. 이를 대상으로 국과수가 사고기록장치(EDR) 데이터 등을 분석한 결과 차량이 완전 파손돼 분석이 불가능했던 경우(42건)를 제외한 나머지 사고(321건) 모두 운전자의 페달 오조작이 원인이었다.
급발진 논쟁을 뜨겁게 만든 ‘시청역 역주행 참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7월 발생한 이 사고와 관련, 검찰은 과학수사 결과를 토대로 사고 원인이 가속페달 오조작 때문이라며 사고 운전자를 구속 기소했다.
앞으로 재판 결과를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EDR(사고기록장치), CCTV를 비롯, 신발 바닥의 패턴 흔적 등을 볼 때 운전자의 페달 오조작 사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자동차 제조사들은 여전히 ‘급발진의 원흉’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청역 참사 이후 두 달이 넘게 지났지만 급발진 의심사고 입증 책임을 제조사에 물리고, 페달 블랙박스 설치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등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급발진 논쟁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뜨겁다. 최근 급발진 주장 사고와 관련된 두 건의 페달 블랙박스 영상이 공개되며 해당 사고가 차량 결함이 아닌 페달 오조작에 따른 것임이 밝혀졌음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자동차 제조사를 비난한다.
우리나라보다 앞서 인구 고령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에선 한 해 3000건 이상의 급가속 차량 충돌 사고가 발생하지만, 차가 스스로 튀어 나갈 수 있다는 의미인 ‘급발진’이라는 용어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급가속’ 또는 ‘페달 오조작 사고’ 등의 용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기본적으로 운전자의 ‘휴먼에러’에 의해 사고가 발생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도 간혹 급발진을 주장하는 사례가 있긴 하지만, 그 경우 솔직하지 못하다며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본은 급발진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대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쪽을 택했다. 2012년부터 페달 오조작 방지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2021년 신차 가운데 이 시스템을 탑재한 차는 93%에 달했다. 이로 인해 사고율은 10년 전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미국에서도 급가속으로 인한 사고가 잦지만 ‘급발진’이란 용어 대신 ‘의도하지 않은 가속(Sudden Unintended Acceleration(SUA)’이라고 지칭한다.
국내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소비자의 권리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미국이었으면 제조사가 철퇴를 맞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과 달리 미국에서도 아직 급발진이 인정된 사례가 없다.
2009년 토요타의 대규모 리콜을 불러온 사고는 국내에서 ‘급발진 사태’로 불렸지만, 사실 전자계통의 오류가 아닌, 운석 바닥 매트에 가속페달이 끼여 발생한 사고로 결론 났다. 이후 페달 끼임 현상(pedal sticking down)으로 급발진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보편화돼 있다.
국내에서 유독 급발진 논쟁이 뜨거운 것은 일부 미디어나 유튜버 등이 불러일으키는 확증편향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들이 내놓는 자극적인 급발진 영상에 자주 노출된 운전자들이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확증편향을 갖게 되면서 페달 오조작 사고를 일으키고도 본인의 착각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급발진을 다룬 유튜브 콘텐츠나 뉴스 댓글에는 그동안 급발진 가능성이 높다고 설파해 온 교수나 정비 명장, 변호사의 책임이 크다는 지적이 확산되고 있다. 이들의 주장 때문에 사전에 방지할 수 있을 페달 오조작 사고를 더 키우게 됐다는 것이다.
“신차 운전자는 더 조심스럽게 운전하기 때문에 실수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사랑하는 가족을 태우고 저렇게 운전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는 소위 전문가들이 급발진 문제를 과학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감정의 영역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유도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차량 결함에 따른 급발진 주장을 펼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EDR’의 신뢰성 문제를 지적한다. EDR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으니 EDR을 기반으로 한 조사는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EDR은 사고가 발생하게 되면 사고 시점 이전 5초 동안의 각종 데이터를 휘발성 메모리에 기록, 저장하는 구조다. EDR에 기록이 필요한 정보들은 각각의 제어기로부터 수신한다. 사고 차량 EDR 분석의 핵심인 가속페달과 제동페달에 대한 정보 역시 각각 분리돼 수신된다.
따라서 EDR로 데이터를 보내는 각각의 모든 제어기가 한꺼번에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가능성은 없다. 제어기에 오류가 발생할 경우 EDR에는 ‘고장’ 또는 ‘유효하지 않은 데이터’로 기록된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에서도 의도하지 않은 가속 사고 발생시 EDR을 기반으로 조사한다. 그럼에도 이들 국가에서 EDR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여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각에서는 급발진 논쟁이 일종의 ‘페달 블랙박스’ 마케팅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급발진 논쟁이 커지면서 국내 페달 블랙박스 시장이 급성장하며 세계 어느 나라보다 활성화 돼 있다는 점에서다.
자동차 업계 한 관계자는 “공교롭게도 급발진을 강력하게 주장해온 이들 가운데 정비 명장과 변호사는 직‧간접적으로 페달 블랙박스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 관계자는 “급발진 논쟁 확산을 통한 페달 블랙박스 시장 확대는 소비자의 불안감과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물건을 구매토록 하는 전형적인 공포 마케팅”이라며 “급발진 주장 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밟고 있는 페달에서 발을 떼라’는 인식의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