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결정적 장면㉕] 윤여정이 남긴 명언 6가지 in ‘파친코’ 인터뷰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2.03.21 11:06
수정 2022.03.21 08:44

지난 3월 25일 공개된 애플TV+ 드라마 ‘파친코’(연출 코코나다·저스틴 전)에서 주인공 선자로 열연한 윤여정이 국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 한창이다. 지난 18일 한국 기자들과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특유의 유머는 여전하면서도 곱씹어볼 만한 명언들을 역시나 남겼다.


극 중 손자 솔로몬을 연기한 배우 진하와 함께 카메라 앞에 앉았는데 한국계 미국인인 그를 국내에 널리 소개하고 싶어 하는 마음,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걸 알리고 싶은 애정이 가득했다. 중간중간 대견하다는 듯 등을 두드리고, 마지막 인사는 한국말로 하라는 조언에서도 배우 진하가 한국에서 활동하고 한국인의 사랑을 받는 배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보였다.


어른으로서, 선배 배우로서 인생과 연기 후배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도 좋았지만, 역시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윤여정이 아니면 하기 힘든 말들이었다. 솔직해서 좋고, 깊이가 느껴져 더 좋은 말들을 소개한다.


“역사는 배우는 게 좋다. ‘자이니치’는 자부심의 단어”


“(제) 엄마가 1924년생, 저는 1947년생. 엄마가 그 세대 인물이시고, 사실 저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일제강점기 시대나 ‘자이니치’(在日, 재일 한국인과 조선인을 일컫는 말)에 대해 잘 몰랐어요. 자이니치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재일동포와 자이니치의 차이가 무엇인지 극 중 내 아들 무자수 역의 박소희 배우가 알려줬어요. 역사는 배우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우리가 (일제로부터) 독립하자마자 한국전쟁이 났고 일본에 남은 한국인들은 (일본 국적의) 재일동포인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 떨어진 사람들, 붕 뜬 사람들이 된 거예요. 고국은 남북으로 나뉘고, 우리 어렸을 때는 (국적을 조선으로 택한 사람을) 조총련이라고 했는데 그게 북한을 택한 게 아니라더군요. 한국말을 배우려면 조총련 학교에 가야 했을 뿐이지 이념적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자이니치’는 나는 한국인으로 산다, 나는 일본인으로 살지 않는다는 뜻, 자부심이라고 해요. 그런 자이니치의 이야기는 내가 (선자가 되어 ‘파친코’를) 찍으면서도 너무너무 가슴 아팠어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간 사람들,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나고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으나 그들은 당장 돌아오지 못했다. 고국은 한국전쟁과 남과 북으로 갈리고 그들은 국적을 택해야 했다. 남쪽을 택하면 ‘한국’, 북쪽을 택하면 ‘조선’이 국적이 됐다. 윤여정의 말대로 우리는 조선 국적의 사람들을 조총련으로 부르며 ‘빨갱이’ ‘공산당’으로 간주했지만, 일본 현지에서의 실상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어를 잊지 않기 위한’ 현실적 선택이었다는 게 배우 박소희의 설명이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건 국적이 남과 북 어디냐가 아니라 ‘일본인이기를 거부했다’는 것, 모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 한국어 교육을 받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후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한국학교가 적었던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이념으로 몰아세우고 색안경을 끼고 외면했던 부끄러운 과거의 한 대목을 정확히 짚어낸 발언이다.


“70대에 아카데미 수상, 제 나이에 감사해 보기는 처음”


“얘(진하) 나이 때 아카데미를 탔으면 (그거 뭐지? 윤여정이 적절한 한국어 표현을 진하에게 묻자 ‘왜 저한테 한국말 물어보세요’라고 반응하며 두 사람이 함께 웃는다. 이내 적절한 표현을 찾아낸 듯) 둥둥 떠다녔을 거예요. 제 나이에 감사해 보기는 처음이에요, 나도 늙는 거 싫은 사람인데. 상이 받는 순간엔 기쁘지만 나를 변화시키진 않아요. 어제 (영화 ‘미나리’ 함께한 배우) 스티븐 연 만나서, ‘너 안 타길 너무 잘했다. 탔으면, 너 아니야’라고 했어요. 노미네이트(후보가 되는 것)만으로 그 나이에 영광이죠. 저의 수상은 운일 뿐이에요.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를 노크했고, ‘미나리’가 팬데믹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아카데미 갔고, 나는 거기서 ‘이상한 할머니’로 수상했어요. 정말 운이 좋았어요.”


윤여정 역시 보통의 우리처럼 늙는 것을 싫어하지만, 너무 어릴 때 아니고 나이 들어 큰상을 받은 것에서만큼은 자신의 나이가 적지 않다는 사실에 감사했다는 말은 머리를 ‘띵’하게 했다. 생각을 거리를 남겼다. ‘빨리빨리 코리아’가 과거에 비해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일찌감치 성공하고 빨리 성과를 얻기를 바라곤 한다. 그런데 서두르지 말란다, 너무 이른 나이의 성공은 ‘나를 나 아니게 하는 독’이 된다고 경고한다.


또 얼마나 솔직한가. 자신의 출연작임에도 ‘미나리’의 제93회 아카데미 진출을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팬데믹이라는 변수로 출품작의 면면이 여느 해와 달라 가능했던 것임을 객관적으로 평한다. 매력과 개성이 넘치는 캐릭터 순자를 ‘이상한 할머니’로 말하고, 수상을 ‘운이 좋았다’고 표현한다. 수상 자체를 폄훼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다른 누구도 받을 수 있었고 받아도 이상할 게 없다는 발언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되레 ‘상 받지 않았던 자신의 모든 연기와 상 받지 않은 많은 배우의 연기’에 대한 존중이 담긴다. 그래서 더욱 “상이 받는 순간엔 기쁘지만, 상이 나를 변화시키진 않아요. 저는 그냥 윤여정으로서 살아갈 뿐이죠”라는 말이 진정성 있게 느껴진다.


“연기는 마스터할 수 없다”


“우리 아들도 ‘코리안 아메리칸’(미국계 한국인)이에요. ‘진하가 어떤 인물이냐’ 아들에게 물었는데, ‘드라마는 형편없는데 진하 하나만 잘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좋은 정보를 듣고 촬영장에 갔는데, 첫 촬영을 기차역 신을 하는데, 크고 핸섬(handsome)하고 이민호(‘파친코’에서 선자의 젊은 시절 연인 한수 역) 같이 생겨야 하는데, 난 늙었으니까 편견이 있으니까, 왜 이렇게 조그맣고 까만 애가 있는 거예요(웃음). 우리 아들만 하게 생겼는데, 애플이 오디션을 몇 달을 해서 뽑은 배우라고? 싶었죠. 첫 촬영을 해보고 ‘쟤 잘한다’고 말했어요. (진하의 등 두드리며) 정말 잘해요. 근데 진하는 자꾸 나를 ‘마스터’라고 부르는데, 연기는 마스터할 수 없어요. 나는 늙은 배우일 뿐, 마스터가 아녜요.”


스스로 연기 잘한다고 생각하는 배우들을 종종 본다. 나이 든 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다. 한국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주인공이 말한다, 나는 마스터가 아니라고. 그런데 그 이유가 만일 ‘제가 아직 그 경지까지는 못 갔어요’였다면 그저 겸양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데, 연기는 마스터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이보다 더하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존중의 뜻을 표할 수 있을까. 데뷔 57년 차 배우의 생각, 더욱 진실로 다가온다.


“인터내셔널 프로젝트? 어디에도 속하기 힘든 이들을 돕고 싶은 것뿐”


“9년밖에 안 살았어요, 13년 살았는데 왜 영어 못하냐 하는데(웃음). 나는, 살 때는 내가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고 생각해요. (미국) 남쪽 조그만 동네 플로리다에 살았어요. 당시 내 친구들은 날 잘 도와주는 사람들이었어요. 영어 못하니까 밖에 잘 다니지 않고, 직장에도 안 갔고, 그러니까 (차별 또는 온전히 미국인이 되는 어려움, 잘 몰랐어요). 제 아들들은 많이 느끼는 문제더라고요. ‘국제 고아’랄까. 한국에 와도 이상하고 한국말 못하니까, 미국에서는 룩(look, 생김새)이 다르고.”


“영화 ‘미나리’ 할 때도 그렇고, 이번 드라마 ‘파친코’에도 그런 게 있어요. 아이작(‘미나리’ 감독 정이삭)을 도와줘야겠다. 우리 아들과 같은 상황, 코리안 아메리칸이 뭘 하겠다고 하는데 도와줘야겠다는 마음. 돈도 못 받았어요, 사람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어요. 내 돈으로 비행기표 사서 갔어요, 촬영하겠다고, (진하에게 발언 배경을 설명하듯 “A24가 알아야 해서”), 농담이고 제가 좋아서 한 거예요. 출연작을 고를 때 인터내셔널 프로젝트다, 그런 맘 없어요.”


배우 윤여정은 드라마 ‘파친코’를 아카데미 수상 이전에, 우리가 그의 세계 진출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 개인적 선의로 선택했다. 영화 ‘미나리’ 때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작품이 된 것이지 그것을 예견하고 국제적 명성을 위해 선택한 게 아니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작은 작품이었고, 출연료를 보장받는 일도 아니었지만, 세상의 많은 자이니치와 코리안 아메리칸처럼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기 힘든 이들이 자신이 발 딛고 선 곳에 안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브래드 피트가 대표인 미국 제작사 A24가 초대형 스튜디오도 아니지만, 제작 콘텐츠 중에 ‘미나리’는 눈에 띄기도 힘든 작은 영화였을 것이다. 그것이 기대 이상의 큰 영광을 가져왔고, 공교롭게도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시상자로 전년도 남우조연상 수상자인 브래드 피트(영화 ‘원스 어 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가 나섰다. 수상자로 호명된 배우 윤여정은 당시에도 브래드 피트에게 “우리가 영화를 찍을 때 어디 있었느냐”는 뼈있는 조크로 촬영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제작사 대표를 향해 일침을 놓았다. 이번 비행기표 발언도 그 연장선에서 읽힌다. 충분한 영광을 누렸다면 성공보수까지는 아녀도 기본 셈은 마치는 게 마땅하다.


“배우는 같이 느끼며 같이 해야 해”


“(국내에서 진행된 프리미어 시사 레드카펫에서) 진하는 어디 갔나 하는데 여자 한복을 입고 머리도 빡빡인 사람이 보이는 거예요. ‘누구야?’, ‘진하요’, ‘쟤 미쳤나 봐’. 리얼 퍼포머(real performer)더라고요. 늙은 배우로서 볼 때 배우가 가수 혹은 퍼포머와 다른 게, 배우는 같이 느끼고 같이 해야 해요. 그래서 모노드라마 싫어해요, 나는(진하: 저도 똑같아요), 자기한테 취해서 하는 것 같아요. 진하하고 나하고 하는 순간, 얘는 손자이고 나는 오랜 세월 산 할머니로 같이 하는 거예요. ‘너는 자이니치라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살아남기) 힘든데, 예일대 나와도 안 되는 게 있는데’라는 뜻을 간단한 말로 ‘니, 안 하면 안 되나’라고 해요. 선자가, 선자의 그런 말이 내 나이에 맞는 역할이라 좋았어요.”


모노드라마 또는 그 배우를 무시하거나 하시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반백 년을 배우로 살아온 경험에 비춰볼 때 연기란 함께하는 것이라, 주고받으며 같이 하는 것이라는 연기철학을 말한 것이다. 배우 한석규의 ‘연기는 리액션이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연기는 상대방 연기에 대한 리액션이다, 나의 리액션은 상대방에게는 다시 액션이 되어 리액션을 부른다던 이야기. 내가 어떻게 캐릭터를 구축하고 현장에서 어떻게 표현해 어떻게 이 인물을 완성했는지를 도취한 듯 말하는 배우들도 많다. 그런데 명배우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연기철학에는 ‘나’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 ‘같이’가 있다.


“액팅은 토론이 아니다”


“저는 그렇게 말해요, 액팅(연기)은 토론이 아니다, 유 저스트 두 잇(you just do it, 일단 해). 액팅을 토론으로 할 거면 연기론을 쓰든지. 저는 그런 거 싫어하는데 그래서 우습다고고도 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래서 날 싫어하고 어떤 사람은 그래서 저를 좋아해요.”


평소 심각한 것을 피하고 골계미 넘치는 유머 감각을 자랑하는 윤여정이고, 후배 배우 진하에게만 철학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그 누구보다 선명한 철학을 지니고 있다. 연기란 무엇이고, 연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짧지만 명쾌한 해답이 윤여정 안에 있다. 놀랍게도 그것은 연기에만 국한되는 명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생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해답이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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