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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결정적 장면㉒]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2.03.03 12:24 수정 2022.03.03 12:24

배우 손숙과 서상원(오른쪽부터)의 연극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연습 현장 ⓒ이하 '늘 푸른 연극제' 제공

삶과 죽음을 종종 절대 만날 일 없는 남처럼 생각하지만, 요단강을 넘어 저편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죽음은 삶 바로 곁에 있다. 내가 삶의 공간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이 세상이 누군가에는 순간순간 죽음의 장소다. 방금까지 쉬던 숨은 삶이고 찰나의 순간 숨만 멈추면 죽음이다. 등을 맞댄 샴쌍둥이 같은 관계건만 우리는 내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살아간다.


연기 고수들의 관록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늘 푸른 연극제’의 여섯 번째 축제에서 상연됐던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를 보면 여실히 확인된다. 삶과 죽음의 공존, 그러나 아무도 죽지 않고 누구도 태어나지 않는다. 극에는 색으로, 또 공기로, 무엇보다 엄마와 아들이 나누는 대화와 관계를 통해 삶 속에 죽음이 깃들어 있다.


엄마는 요양원에 있고, 아들은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목장에 살고 있다. 엄마는 새로 증축했다는 아들 집에 가보고 싶고 손주들을 보고 싶고 드넓은 자연을 눈에 담고 싶지만, 일년 중 유일하게 요양병원을 나설 수 있는 때는 크리스마스뿐이다. 그것도 다른 집 가족들은 2주 전에 데리러 오는데 엄마의 아들은 3일 전에 온다. 하지만 엄마는 여느 요양원 입원자들처럼 미리부터 들떠 있고 설레는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한다.


웬일인지 올해는 아들이 2주 전에 왔다. 블라우스도 다려 놓지 않았고 구두도 닦아 놓지 않았다고 속상해하지만, 말뿐이다. 엄마는 이미 아들 가족을 위한 선물을 사서 다 포장해 놓았고 옷만 갈아입으면 출발할 수 있는 ‘24시간 대기’ 상태다. 그런데 2년마다 차를 바꾸는 아들은 신형 고급세단을 몰고 왔지만, 좀처럼 엄마를 모시고 나가 신차에 태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소시지 공장을 하는 아들이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혼합한 신제품의 신통찮은 매출에 스트레스를 표출할 때, ‘에이그, 엄마 모셔 가지 않으려는 속셈이군’ 눈치채지만 예상치 못한 그 이상의 ‘뒤통수’가 있으리라고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 뒤통수에서 엄마는 물론이고 보는 이의 씁쓸함과 배신감이 깊어진다.


마치 요양원은 현대판 고려장처럼 엄마를 버린 곳이고, 아들에게 엄마는 이미 본인의 삶에 편입돼 있지 않은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의 존재다. 비유하자면 은행의 ATM 기기처럼 돈을 만들 수 있는 기제일 뿐인데, 심지어 그 돈은 자신이 예금해 놓은 게 아니니 아들은 남의 돈을 훔치는 도둑인 셈이다. 도둑이다 보니 엄마의 살아있는 손, 사인을 할 수 있는 손이 필요하다. 엄마는 그 순간에만 살아있는 존재이고, 사인이 끝나면 다시 죽음으로 돌아간다. 죽은 존재이니 아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를 외치며 요양원을 나설 수 있다.


놀라운 것은 그 아들이 파렴치한으로 그려지지 않고,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평범한 우리의 모습일 뿐이다. 아들은 그저 본인의 삶을 살 뿐이다. 이미 희끗희끗 초로의 나이면서도 자신은 천년만년 죽지 않을 것처럼 사업을 확장하고, 스스로 태어난 것처럼 아내와 자식만 가족으로 여기고, 투자자와 그의 아들에게는 방을 내주고 소파를 내줄지언정 엄마에게는 “당신을 위한 공간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런데 그게 뭐 그리 특별히 나쁜 인간으로 비추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가슴을 베이고 간담이 서늘하다. 우리는 때로 나의 모습을 객관화 해 볼 필요가 있다. 무대 위에 올려진 나를 볼 이유가 있다.


컬러와 흑백의 공존, 삶과 죽음의 공존 ⓒ

초입에 ‘색으로’ 삶과 죽음의 공존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독일 TV에서 방송된 하랄트 뮐러 원작의 ‘고요한 밤’을 배우 손숙(엄마 역)과 서상원(아들 역)의 2인극으로 간결하게 각색해 낸 작품이기에 이병훈 연출가는 군더더기 설명을 계속 붙이기보다 공간 자체 그리고 색으로 주제 의식을 시각화했다.


먼저 엄마의 의상. 엄마는 아들이 오기 전까지 갈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다. 아직도 여성이길 바라는 마음이 엿보이는 A라인의 치맛자락이지만, 색감이 바싹 마른 고목처럼 보인다. 아들이 오니 연초록빛이 감도는 조끼를 걸친다. 고목에 이파리가 달리는 느낌이다.


아들네로 간다는 설렘에 엄마는 한 벌의 핑크빛 치마 정장으로 갈아입는다. 요양원 동료의 자식 결혼식에 가느라 마련했다는 분홍빛 옷에서 여심이 읽힌다. 죽거나 결혼하거나, 요양원을 탈피하는 딱 두 가지 방법 중 후자를 원하는 엄마의 간절한 바람이 보인다. 집에 데려가지 않으려는 아들 계획은 모른 채 엄마는 보랏빛 코트에 빨간 모자, 상아색 구두까지 완성한다.


하지만 아들은 엄마의 손만 빌린 뒤, 엄마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들만 챙겨 떠난다. 엄마는 극의 시작에서 그러했듯 침대로 가 눕는다. 진정 죽은 것인가 싶게 꼼짝하지 않고 누워 보는 이를 긴장시키고 안타깝게 하던 엄마는 왼팔을 들어 이마 위에 올린다. 휴, 살아있구나. 몸은 살아있음을 확인시키나 엄마의 안색에는 죽음의 냄새가 드리워 있다.


여기서 침대는 엄마의 옷색보다 더욱 삶과 죽음의 공존을 보인다. 엄마가 쓰는 방은 2인실이다. 작은 침대 두 개가 놓여 있는데 왼쪽에는 어두운 조명과 함께 짙은 먹색으로 보이는 담요가 덮여 있고, 오른쪽 침대는 온통 분홍색 시트와 레이스로 장식돼 있다. 그런데 어쩐지 엄마는 처음에도 끝에도 왼쪽 침대에 눕는다. 그 침대의 주인은 얼마 전 죽음을 맞이했다.


무대는 마치 두 개 침대의 대조를 통해 죽음과 삶이 나란히 놓여 있는 형상을 연출하는데, 엄마는 살아있는 자신의 분홍빛 침대가 아니라 죽은 동료의 침대에서 시름을 죽인다. 엄마의 삶은 침대에서도, 아들에게서도 죽음으로 몰려 있다. 살아 있는 자신의 밝은 침대보다 죽은 이의 어두운 침대가 익숙한 엄마의 삶. 진정 살아있는 것일까.


어제를 지켜 오늘을 세운 주역들 ⓒ

제6회 늘 푸른 연극제는 코로나19로 힘들었던 공연계에도 ‘봄’이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래도 봄’이라는 주제로 지난 2월 열렸다. 참가작 ‘물리학자들’, ‘몽땅 털어놉시다’, ‘건널목 삽화’,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의 면면을 보니 원로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에너지 큰 배우들이 ‘여전히 봄’을 보여주었다.


죽음을 밀어내야 오롯이 삶인 게 아니고, 인생의 겨울을 외면해야 내가 봄인 게 아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듯, 선후배 배우가 함께 사는 무대가 예술이다. 내년에도 늘 푸른 연극제가 문을 활짝 열고 아직 인생과 예술을 모르는 우리에게 한 수 가르쳐 주기를 고대한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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