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㊴] 양하청 장군의 온성작전을 아시나요?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1.07.27 14:00
수정 2021.07.27 09:48

1920년 3월 18일 새벽, 양하청이 이끄는 독립군이 국내 진공 작전을 마치고 두만강을 넘어 무사히 복귀했다.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는 대성공이었다. 반면 지역 내 일본군은 밤사이 일어난 독립군의 작전으로 우왕좌왕했을 뿐만 아니라 1명의 중상자까지 발생했다. 말 그대로 참패였다.


양하청 장군의 국내 진공 작전은 말 그대로 치밀하게 준비된 작전이었다. 그 시점부터 절묘했다. 겨울철 두만강은 결빙으로 어디서나 손쉽게 넘을 수 있다. 강을 넘기 위한 배도 필요 없고, 수영을 못해도 도하가 가능한 그런 시기다. 반면 눈 쌓인 얼음판 위를 넘는다는 것은 일본군의 감시망에 걸리기도 쉽다는 의미였다. 넘어가기는 쉽지만, 자칫 일본군이 감시하고 있을 경우 몰살당하기도 쉬운 그런 때였다. 이 때문에 더욱더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양하청 장군이 노린 시점은 그믐달에서 초승달로 넘어가는 때였다. 17일 밤 온성의 하늘은 별빛만 빛나는 어두운 날이었다. 그믐달에 독립군은 여러 무리로 나뉘어 두만강을 넘었다. 혹시 모를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감시가 어려운 그런 날을 택한 것이다.


독립군은 17일 저녁 11시경에 온성에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장덕동(①)을 공격했다. 그리고 2시간 후인 18일 새벽 1시경 온성에서 동서쪽으로 10km 떨어진 월파동(②)을 공격했다. 이날 독립군의 공격은 월파동이 끝이 아니었다. 약 5시간 후인 6시 30분경, 독립군은 온성에서 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미산 헌병감시소(③)까지 습격했다.


사실 이날 독립군의 국내 진공 작전에서 백미는 미산 헌병감시소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군 주력부대는 새벽 독립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주력부대를 장덕동으로 보낸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월파동이 공격을 당하자 일본군은 미산 헌병감시소에서 월파 헌병감시소를 지원하도록 지시하였다. 왜냐하면 일본군 주력부대가 위치한 장덕동에서 월파동까지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월파동에서 가까운 미산 헌병감시소에서 지원하도록 한 것이다.


미산 헌병감시소에서는 지시에 따라 인원을 파견해 새벽 내내 월파동 방면을 수색했지만 전혀 성과를 얻지 못했고, 결국 새벽 6시경 미산 헌병감시소로 복귀했다. 이때 양하청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당시 일본군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시소는 ‘십자화’로 공격을 당했다. 실제로 미산 헌병감시소는 완전히 포위된 채로 공격을 당했다. 그 결과 일본군은 제대로 된 반격도 못한 채 감시소에 의지하여 목숨만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이후 전투는 독립군이 감시소 동쪽으로 철수하기 전까지 계속됐다.


미산 헌병감시소 전투를 백미라고 칭한 것은 두만강을 넘었던 독립군이 전원 무사히 다시 강을 넘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두만강 결빙은 어디서든 배 없이 강을 넘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지만, 자칫 감시하는 일본군이 있다면 사격 등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서 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강을 감시해야 하는 감시원을 양하청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이 감시소에 완전히 묶어 두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무사히 두만강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온성작전을 성공시킨 양하청 장군은 함경북도 경흥군 출신으로 일찍이 만주에 망명해 이범윤, 홍범도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양하청 장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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