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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폴 세잔, 진중권 그리고 '그'

강현태 기자
입력 2020.03.25 05:10 수정 2020.03.25 06:07

실재(實在)하는 것보다 더 실제적인 세잔의 그림

같은 현상이 현실에선 '탈진실'로 불려

한 관람객이 미술품을 관람하고 있다(자료사진). ⓒ뉴시스한 관람객이 미술품을 관람하고 있다(자료사진). ⓒ뉴시스

폴 세잔의 그림은 어딘가 일그러져 있다. 사과가 모과마냥 퍼져있고, 사과가 올려진 접시는 한쪽이 더 볼록하다. 심지어 접시가 놓여있는 테이블은 기울어져 있는 듯하다. 이상하다.


한데 이런 세잔이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는 뭘까.


세잔은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원근법을 무시한다.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인상주의와도 다르다. 세잔은 여러 각도에서 본 것을 평면에 담아낸다.


세잔의 오랜 팬이자 미학자인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세잔의 그림을 뇌과학적 지각에 비유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인간은 사물을 두 눈으로, 안구를 움직여 시점을 바꿔가며 본다"며 "실제 지각 과정은 광학적이 아니라 뇌과학적이다. 그때그때 시점과 초점과 위치를 바꿔가며 지각한 파편들을 뇌 속에서 하나의 전체상으로 종합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얼핏 일그러져 보이는 세잔의 그림이 인간의 실제 지각방식과 흡사하다는 얘기다.


세잔의 풍경화 속 건물, 그중에서도 창문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해가 쉽다. 분명 같은 벽에 자리한 창문이건만 어떤 창문은 정면으로, 어떤 창문은 삐뚤게 나있다. 이따금 치솟거나 주저앉은 지붕도 기이하다. 대칭미를 찾아보기 힘든 그의 풍경화 속 건물은 위태롭기 그지없다.


한데 갸웃대는 고개를 몸의 리듬으로 바꿔 풍경화 속을 거닐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순간 그림은 감상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체험이 된다.


그럼에도 세잔이 그려낸 정물과 풍경은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보다 더 실제적으로 느껴지는 현상, 그것은 미술사에 있어 '예술적 성취'로 여겨지지만 현실에선 '탈진실'이라는 용어로 요약된다.


진 전 교수는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의 권력 관계를 꾸준히 설명해왔다. 그가 최근 탈진실을 주제로 한 언론사에 연재를 이어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진 전 교수는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서도 연일 탈진실을 꼬집고 있다. 그의 신랄한 문장을 따라 가다보면 결국 어느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가 장관이던 시절 인상깊게 본 뉴스가 하나 있다. 자신으로 인해 나라가 두 쪽 난 상황에서도 관용차를 타고 미술 관람을 하러 갔다는 뉴스. '그'는 미술관 대표의 작품설명을 들으며 "우와!" "와!"하는 감탄사도 내뱉었다고 한다.


해서 문득 나는 궁금해져 이 글을 쓴다. '그'는 일그러진 세잔의 그림을, 퍼져있는 과일과 위태로운 건물을 보고 무어라 할까. 감탄사를 연발할까 말을 잇지 못할까. 어느 쪽이든 비극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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