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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탄핵 배경은 결국 대선 불복과 투쟁의 일상화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7.02.26 21:20
수정 2017.02.26 23:40

<자유경제스쿨>참여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전부인양

후진 민주주의의 특징은 지속적인 정치적 불안정

박근혜 대통령 취임 4주년인 25일 오후 서울 세종대로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7차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박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자유한국당 해체, 특별검사 수사기한 연장 등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대선 불복의 정치와 대통령제의 위기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재판을 마무리하며 결정을 준비하고 있다. 대한민국 대의민주주의와 헌정질서의 ‘유지냐, 붕괴냐’라는 위기의 시간이다. 대통령 탄핵의 근본 사유가 되는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고영태와 그 주변 인물들의 국정농단으로 그 실체가 바뀌어 가는 현 시점에서 헌법재판소의 판결 결과에 따라 앞으로 탄핵이라는 정치적 불안정이 일상화된 정치체제가 되느냐, 아니면 정치적 탄핵이라는 불안정 요인이 항구히 사라진 체제가 되느냐의 순간이다.

현재 우리의 민주정치 체제는 1987년 6월 민주화 투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결과는 5년 단임 직선 대통령제의 도입과 민주화 투사들의 정치권 및 시민사회 영역에의 대거 진입이었다. 그리고 권위에 대한 도전, 권위주의에 대한 투쟁, 반정부 시위, 광장에의 참여가 민주적이며 또한 정의로운 것으로 미화(beautification)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87년 이후에도 ‘투쟁의 정치’가 지속됨에 따라 대통령들은 반복적으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투쟁의 정치’가 정치적 불안정(political instability)과 정치적 위기(political crisis)를 만들어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선거에 패배한 세력들이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도전했다. 나아가 정권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실패해야 다음 대선에서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현직 정권 흔들기와 정치적 위기 만들기에 집중하였다.

예를 들어 87년 민주화 이후 첫 번째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다수에 못 미치는 소수 지지에 근거한 출신 대통령이라는 정치적 위기를 맞아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을 만들어 돌파하였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양김(金)’의 카리스마와 젊은 민주화 투쟁 세력과의 연대와 회유로 위기를 극복했다.

하지만 이후 당선된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은 모두 대선에서 패배한 세력들로부터 심한 도전을 받게 되고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다. 2002년 16대 대선, 2008년 17대 대선, 2012년 18대 대선 등 지난 3차례의 대선 이후 정국의 전개는 대선 불복 투쟁의 반복성과 그 폐해(弊害)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정권이 흔들렸고, 국정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대선에 패배한 세력이 새로이 당선된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불인정 투쟁을 이어간 대선 불복 투쟁 지속의 결과 때문이었다.

첫 번째 사례는 노무현 대통령이다. 당선되고 1년이나 지나고 나서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 관련 발언을 자주하다 ‘정치적 중립성’이 문제가 되어 2004년 3월 국회에서 탄핵되었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을 인정할 수 없었던 반(反)노무현 진영은 대선 1년이 지나서도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국민들이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정도의 발언이었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공직자 선거 개입’을 수차례 명확히 지적하였다. 이러한 선거법 위반을 근거로 국회는 탄핵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탄핵은 역풍을 맞았고, 그 결과 열린우리당은 4월 15일 17대 총선에서 152석이라는 단독 과반으로 대승했다. 헌법재판소는 총선에서의 열린우리당의 승리를 탄핵에 대한 국민의 의견 표시로 이해하고 탄핵소추안을 기각시키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2008년 17대 대선에서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정동영 민주신당 후보를 역대 최대의 530만여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100여일 만에 광우병 미국산 쇠고기 촛불 시위를 맞아 정권 퇴진 위기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소고기 협상에서 미국산 소고기의 수입을 허락한 ‘죄 아닌 죄’로 2008년 5월부터 7월까지 촛불에 지짐을 당했다. 결국 눈물에 겨운 대통령의 사과와 ‘명박 산성’으로 이명박 정권은 청와대를 지켜냈다.

하지만 약 3개월간 지속된 촛불 시위에서 ‘이명박 퇴진’, ‘MB OUT!’ 구호는 기본이었고, 촛불시위에서 대통령에 대한 조롱은 선을 넘었다. 광우병 촛 불 시위의 본질은 17대 대선에서 패배한 좌파진보 진영이 분노했고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대선에서 패배한 좌파진보 세력은 이명박 대통령을 한번 크게 흔들고 패배를 복수했던 것이다. 광우병 촛불시위대가 시위를 시작할 때부터 ‘이명박 퇴진’, ‘MB OUT!’을 외쳤다는 점에서 대선 결과 불복의 표징을 볼 수 있다.

2012년 대선 직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대선 불복 투쟁도 적어도 6개월 이상을 끌 것이라고 예상했다. 18대 대선에서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는 ‘지극히 근소한 표 차이로’ 패배했다고 생각한 많은 좌파, 야당 지지자들이 박근혜 후보를 당선 시킨 한국 정치를 “이게 민주주의냐?”라고 심하게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을 탄압하고 구속했던 (독재자) ‘박정희’(대통령)의 딸이 어떻게 민주적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칼날이 시퍼렇게 선 분노였다. 좌파진보 진영이 패배했기 때문에 ‘공정하지 못한’ 선거였고, 패배를 받아들일 수도, 새로 당선된 대통령을 인정할 수도 없었다. 과거의 대선 결과 불복 투쟁과 비교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반발, 조롱, 비난, 불인정의 강도가 높았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대선 불복 투쟁은 더욱 길어졌고, 정권 흔들기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민주당은 대선 불복투쟁의 선봉에 서서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과 선거 공정성 문제를 가지고 줄기차게 2013년 한 해를 끌었다. 처음에는 국정원 직원의 댓글이, 그 다음에는 트윗이 문제가 되었다. 새누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 관련 발언의 진위와 사초(史草) 실종 이슈를 꺼내 민주당과 반대세력으로부터의 반발을 이겨냈다. 첫 번째 위기 돌파였다.

대선 불복 세력에 의한 두 번째 박근혜 정권 흔들기는 세월호 침몰에 대한 대통령의 책임 공방이었다. 책임 공방에 대통령 행방 의혹 7시간이 보태졌다. 소모성 정쟁이었지만 박근혜 대통령 흠집 내기에는 대성공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타격이 최순실에 대한 비리 폭로와 그 이후의 탄핵 진행이다.

광우병 촛불시위, 국정원 대선개입 시위, 세월호 시위, 최순실 비리 촛불시위를 관통하는 흐름은 대선 결과에 대한 불복, 즉 원하는 대통령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트럼프(Donald Trump) 당선 이후 “You are NOT my President!”라는 구호로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있었지만 취임 1개월이 지나자 거의 사라지고 없는데 반해 우리의 경우는 상당히 지속적이다. 박근혜 대통령 기간 거의 모든 시위들이 대선 불복 투쟁과 깊숙이 연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는 대규모 시위 주도 집단이 모두 유사하다는 점, 그리고 시위 시작부터 ‘대통령 하야’를 구호로 외쳤다는 점, 그리고 정책에 대한 반대보다는 대통령 인신공격이 주가 된다는 점 때문이다.

정치적 불안정의 일상화

선거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을 탄핵이나 시위로 끌어내리려는 의도는 ‘노무현 퇴진’, ‘이명박 OUT’, ‘박근혜 하야’의 외침이 시위의 시작부터 터져 나오는 것에서도 모두 유사하다. 합법적인 선거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을 명백한 불법이 없이도 퇴진시키려는 시위나 투쟁은 결국 국정 운영의 비효율성으로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정치의 불안정을 초래하며, 나아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가는 핵심 원인이다.

교과서적인 대통령제의 장점은 “대통령 임기의 고정에 의한 정권의 안정과 정책의 효율적 수행”이다. 하지만 우리의 대통령제는 앞서 설명한대로 대선 불복 투쟁의 지속으로 도리어 정치적 불안정이 일상화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87체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 또는 참여/광장 민주주의의 과잉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참여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가 민주주의의 전부인 양 찬양하는 일부 진보좌파 학자들, 언론들, 시민운동가들, 강성 노조원들이 ‘참여’를 강조하며 광화문에서의 시위를 일상화하는 동안 정치의 민주화가 경제에까지 확산되어 ‘경제민주화’가 등장하고 국가 경제는 불안정한 남미(南美) 경제로 변해 갔다. 그리고 정치도 우파보수-좌파진보의 첨예한 정치적 대립이 일상화 되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경제의 남미화, 정치의 남미화는 모두 경제적 불안정과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후진 정치, 후진 민주주의의 특징은 지속적인 정치적 불안정이다. 절제된 시민 행동과 참여에 의한 안정 없이 선진 민주정치는 만들어질 수 없다. 참여와 요구가 너무 커서 정치권과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문턱(threshold)을 넘게 되면 그 국가는 효율성을 잃고 붕괴하게 된다.

따라서 참여 민주주주의의 ‘참여’의 핵심은 촛불을 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여서 함께 토론(discussion)하고, 심의(deliberation)하고, 숙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형성임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사회적 자본이 기반이 되어야 민주주의의 절제, 관용, 용인, 타협이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권, 언론, 학계 모두 시민의 ‘참여’(또는 참여민주주의)를 ‘대의’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한정해야 하지 ‘(촛불) 참여’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음에도 시민에 의한 ‘직접 참여’와 그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태도는 안정된 선진 대의 민주정치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지양해야 한다. 최근 대한민국 정치의 문제들도 ‘참여’의 부족이 아니라 ‘참여’의 과잉 속에서 어떻게 대의민주주의와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헌정질서를 공고히 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은 ‘87체제’ 30년이 되는 해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경제는 과거 고도성장이 멈추고 좌파 포퓰리즘이 주도하는 남미(南美) 경제를 닮아 가고 있고, 정치는 대선 불복의 반복으로 정치적 불안정이 일상화 되고 있다. 87년 민주화 체제(democratic regime)가 결과한 것이 경제에서는 저성장이요, 정치적으로는 대선 승자와 패자의 대결과 투쟁의 일상화라면 이제는 폐기하고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자유화’ 체제(neo-liberal regime)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글/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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