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인터뷰]신성민 "벙커 안 관객들의 기(氣), 신나는 경험"
입력 2017.01.08 07:00
수정 2017.01.08 08:48
세계대전 속 20평 벙커 안, 삶과 죽음의 의미 조명
3면을 둘러싼 관객들과 함께 호흡 '아주 특별한 무대'
"관객들이 기(氣)로 무대를 뒤덮는 게 아니라, 기를 공간 안으로 몰아줘요. 정말 쫀쫀하게 모아주셔서 무대를 정말 호텔처럼, 그리고 벙커처럼 만들어주죠. 그런 기가 (배우를) 신이 나게 하고, 공연을 할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요."
배우 신성민(32)은 비좁은 공간에서 관객들을 코앞에 두고 연기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 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배우들에게 얘기했더니, 다들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며 '트릴로지' 시리즈만의 이 소중한 경험에 자부심을 드러냈다.
지난해 12월부터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벙커 트릴로지(작-지이선 /연출-김태형)'은 제1차 세계대전 참호를 배경으로 아서왕 전설-아가멤논-맥베스 등 총 3개의 고전을 재해석해 독립된 이야기로 진행되는 옴니버스 작품이다.
고전과 전쟁의 만남이라는 독특한 콘셉트도 그렇지만, 이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하는 건 무대 그 자체다. 20평 남짓한 비좁은 공간을 벙커로 꾸몄고, 그 안에는 출입구 쪽을 제외한 3면에는 약 100명의 관객들이 가득 채운다. 배우와 관객의 거리는 불과 1m가 채 안 된다.
하지만 신성민은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며 이 작품의 특별한 매력을 강조했다. "공연을 본 가까운 지인들이나 동료 배우들도 그렇게 거리가 가까운데 어떻게 연기를 하냐고 많이 물어요. 저 역시 처음엔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오히려 훨씬 집중이 잘 돼요."
오히려 그를 힘들게 한 건 이 작품이 '고전'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다. 이미 여러 작품을 통해 군인 역할을 해온 탓에 전쟁이나 군대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지만, 배우로서 처음 경험하는 고전은 높은 성벽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그의 곁을 지켜준 건 작품에 함께 출연하는 대선배 이석준이었다.
"항상 작품이 끝나면 사람을 얻는 것 같아요. 석준 선배님은 정말 새벽에도 같이 나와서 도와주셨거든요. 연출님이 그려준 그림과 상황들 말고 배우가 직접 안에 들어갔을 때 필요한 것들, 특히 화술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끄집어내주셨어요."
러닝타임 70분의 연극 3편을 동시에 공연하는 건 체력적, 정신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신성민은 시나리오조차 보지 않고 출연을 결심했다. "힘든 만큼 연극이 주는 에너지로 얻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게 그 이유다.
'모르가나(MORGANA)'는 전쟁의 참혹함을 알지 못한 채, 군인이 된 젊은 청년들이 서로를 죽이고 그 죽음의 한가운데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고통을 생생하게 무대 위에 펼쳐 보인다.
'아가멤논(AGAMEMNON)'은 영국인 부인 크리스틴을 둔 독일군 저격수 알베르트가 전쟁에 참전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다루며, '맥베스(MACBETH)'는 참호를 공격하는 거대한 포격 소리와 숨통을 조이는 독가스 공격 등에 인간의 모든 것이 잠식당할 때 드러나는 본능과 본성에 주목했다.
신성민은 세 가지 작품이 공통적으로 담은 건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정말 많이 죽거든요. 허망하고 허무한 감정들이 느껴져요. 특히 '아가멤논'에선 몇 번 나가지도 않는데 계속 죽어요. 작품 안에서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이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왔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신성민은 특히 공연이 거듭될수록 "인물의 깊이가 더 깊어지게 되는 것 같다"며 "연습할 때는 작품의 완성도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은 인물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고 말했다.
"트릴로지 시리즈는 관객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지 피드백이 굉장히 빨라요. 그래서 그런지 연습할 때와 공연할 때 조금씩 변하는 것들이 있고, 저 또한 연습 때 찾지 못한 걸 무대에서 찾을 때가 있어요. 그런 과정이 재미있어요."
2010년 뮤지컬 '그리스'로 데뷔한 이후 어느덧 8년차 배우가 됐다. 그 사이 포기하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결국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일을 해왔고, 행복했다는 걸 느낀다"는 신성민은 "롤 모델을 따라가기보다는, 정체돼 있지 매 작품 배워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며 소박한 꿈을 밝혔다.
하지만 소박한 꿈 안에 꿈틀대는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것이 더 큰 배우로 발전해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안게 한다. '벙커 트릴로지'로 벌써 두 걸음 더 나아간 신성민이다.
"지금 상황에 최선을 다하면 연구하고 발견해 나가면 작은 점들을 찍었을 때 선이 될 수 있는 배우가 되지 않을까요."
'벙커 트릴로지'는 매일 여지를 남겨놓고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며 완성해가는 작품이다. 신성민 외에도 박훈, 이석준, 정연, 김지현, 오종혁, 임철수, 이승원 등이 출연하며 내달 19일까지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