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실세들 죽게 만드는 '측근자파티'의 실체 폭로
입력 2016.01.04 08:36
수정 2016.01.04 08:45
고위 탈북자 "김정일때부터 술자리는 상상 초월 난장판"
"양주 폭음하면 즉석 선물…연회장 안에 간이침대도..."
지난달 29일 김양건 노동당 비서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가운데 북한 최고 존엄의 '파티문화'에 새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과거 북한 고위 간부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벌인 '측근자파티'에 참석한 후 만취 상태에서 운전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 최고 존엄이 주최하는 연회에는 운전자를 대동하지 않고 참석하기 때문에 만취한 상태로 차를 몰다가 사고를 당한다는 것이다.
김정일 집권당시 개최됐던 측근자파티는 매우 난잡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독한 양주를 물컵에 따라 두세 잔을 연거푸 마시거나 이른바 '기쁨조'들을 끼고 벌이는 술 파티는 매우 문란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도 아버지의 이런 파티문화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북한에서 고위층 문화를 향유하다가 남한으로 망명한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파티 매니아'였다.
김정일의 처조카인 이한영(본명 리일남) 씨가 1996년 펴낸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성혜림 조카 이한영이 본 남북한 25시'에 따르면 김정일의 '측근자파티'는 1972년부터 시작됐다. 1972년 이전에도 김정일은 마음이 맞는 측근들을 불어다가 술파티를 벌이기도 했는데, 1972년부터는 이 모임을 '측근자파티'라고 부를 정도로 모임을 정례화했다는 증언이다.
이한영 씨에 따르면 김정일은 1973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차기 지도자로 공식 선출되는데 이때부터는 '측근자파티'가 본격화됐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열리는 이 연회는 초기 소수의 인원만 모였지만 1977년부터는 참석자가 40여명정도로 늘어났다.
파티가 열리는 장소는 김정일의 집무실 옆 공관 2층 연회장으로 이곳은 150평 규모의 공간을 자랑한다. 연회장에는 80~90명 가량이 앉을 수 있는 원형 테이블이 다수 놓여있으며 한쪽에는 무대가 마련돼 있다. 보통 한 테이블에 고위급 간부 5명과 간부들 사이사이에 이른바 '기쁨조'라고 불리는 공연조 무용수들이 앉아 시중을 들었다.
연회장에는 10여개의 간이침대도 놓여 있는데 음주를 하다가 쓰러진 간부들을 쉬게 하기 위해 마련해놓은 것이다.
이한영 씨는 자신의 책을 통해 "참석자들은 7시 반이면 모두 도착하고 참석자들이 모두 모이면 2층으로 이동한다"면서 "연회장 입구에는 그날의 당번이 서있는데, 당번은 먼저 와서 들어오는 참석자들에게 양주를 물컵으로 한 컵씩 준다. 그걸 마셔야 입장이 가능한데, 지도자 앞이라고 주눅 들지 말고, 파티하는 순간만큼은 가벼운 실수를 해도 좋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김정일이 연회가 시작되는 오후 8시 별도의 입장문을 통해 등장해 자리에 앉으면 그때부터 온갖 산해진미가 나오기 시작한다.
참석자들이 어느 정도 술에 취한 상태가 되면 김정일이 참석자들에게 남한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하기도 한다. 당시 연회에 참석한 북한 고위 간부들이 즐겨부르던 노래는 '이별', '하숙생', '찔레꽃', '경상도 아가씨',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나는 열일곱살이에요', '동백아가씨' 등이었다.
연회가 끝나는 시간은 김정일이 취하는 시점이다.
1997년 망명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김정일이 벌이는 술자리는 상상을 초월한 난장판"이라면서 "김정일이 술자리에서 한사람을 지목하면서 '오늘부터 너는 중앙당 위원회 위원이다'라고 선언하면 그대로 되고 '아무개는 철직(해임)이다'라고 선포하면 그대로 집행됐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은 측근자파티에서 독한 양주를 연거푸 마시는 간부에게 달러를 즉석에서 선물하는 등 과음을 종용하기도 했다.
'김정일의 요리사'로 알려져있는 후지모토 겐지 씨는 자신이 펴낸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라는 책을 통해 "김정일은 간부들에게 술내기를 시킨다. 독한 양주를 세잔 연속 마시면 1500달러를 주겠다는 식"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당시 김정일의 측근자파티에 참석했던 후지모토 겐지 씨는 김정일의 "브랜디 파라디스 백그램을 세잔 마시면 천오백달러를 너에게 주겠다"는 제안에 세잔을 연거푸 마시고 1500달러가 든 봉투를 챙기기도 했다.
김정일의 기분이 좋을 때는 퇴폐적인 '섹스파티'가 허용될 때도 있다는 증언도 있다. 간부들의 파트너로 참석하는 공연조 무용수들은 파티에서 술시중을 들거나 마련된 무대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김정은의 친모인 고용희(고영희)도 측근자파티에서 김정일의 파트너로 참석했다가 김정일의 와이프로 자리잡았다는 것이 이한영 씨의 증언이다.
이 씨는 "처음에 김정일에게 고정 파트너가 없었는데 1975년부터는 무용수 고용희가 고정적으로 김정일 옆에 앉기 시작했다"면서 "1975년부터 파트너가 됐으면 그때 고용희의 나이가 22세인데, 김정일이 1976년부터 그를 들어앉힌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1977년부터는 아예 파티에도 참석시키지 않았다. 당시 어디에다가 살림을 차렸는지는 모른다"면서 "다만 나중에 창광산관저를 고용희에게 주었는데 그때가 고용희가 임신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고용희는 1981년 김정철을 낳았다"고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