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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호 납북자 어머니 만난 북 며느리 "차별 안받아요"

금강산 공동취재단 데일리안 목용재 기자 /서울 = 하윤아 기자
입력 2015.10.24 20:36 수정 2015.10.25 09:25

<이산가족 상봉 현장>40년 이별의 한 통곡으로 대신

"사니까 만나게 되네요" 북에서 결혼한 아내 소개도

제20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첫날인 24일 오후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단체상봉에서 이복순 할머니가 납북된 아들 정건목씨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감격의 상봉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제20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첫날인 24일 오후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단체상봉에서 이복순 할머니가 납북된 아들 정건목씨와 며느리 박미옥씨를 만나 포옹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남조선 출신이라고 차별하지 않아요. 걱정 말아요.”

1972년 오대양호 납북 사건 당시 북에 끌려간 정건목 씨(64)는 남측 누나 정정매 씨(66)와 여동생 정정향 씨(54)가 24일 오후 금강산호텔 상봉장에 도착하자마자 양팔로 두 사람을 끌어안으며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여동생 정정향 씨는 연신 “오빠야! 오빠야”를 외치면서 그간 쌓였던 그리움의 한을 털어놨다.

말을 잇지 못하고 엉엉 울기만하던 정건목 씨는 여든이 훌쩍 넘은 어머니 이복순 씨(88)가 휠체어를 타고 뒤늦게 상봉장에 도착하자 곧장 어린아이처럼 품에 안겼다. 그는 이 씨를 꼭 부여잡고 “엄마”라고 외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정 씨는 함께 온 아내 박미옥 씨(58)를 어머니에게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어머니 이 씨는 처음 만난 며느리의 손을 꼭 잡은 채 눈시울을 붉혔고, 정 씨는 다시 누이와 여동생을 끌어안고 한참동안 울음을 터뜨렸다.

1972년 서해상에서 조업을 하던 중 북한 경비정에 의해 끌려간 오대양 62호 선원 정건목 씨. 그는 43년 만에 금강산에서 남측의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을 만났다.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무쳤던 그리움을 그는 통곡으로 뱉어냈다.

아들 정 씨는 어머니에게 “고생하셨지. 아들 살아있어. 울지 말라”면서 자신의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어머니의 얼굴에 흘러내리던 눈물을 닦아냈다.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좋다”고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던 정 씨는 상봉장 안이 시끄러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어머니가 내 소리도 못 듣겠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아내 박미옥 씨가 앉은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떨어져 앉은 그는 “사니까 이렇게 만나네요. 보세요. 얼마나 건강하게 사는지”라며 연신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내려는 모습이었다. 특히 어머니 이 씨가 “병원비가 많이 들지 않느냐”라고 묻자 아들은 “우리(북한)는 다 무상으로 해준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며느리 박미옥 씨 역시 시어머니와 시누이, 시동생에게 재차 “아들 걱정, 오빠 걱정 하나도 하지 마십시오”라며 남측의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박 씨는 “당이 오빠(정건목 씨) 조선노동당원 시켜주고 공장 혁신자도 되고 아무런 걱정할 것 없다”며 “다 무상이라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남편이 남조선 출신이라고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박 씨는 시누이 정정매 씨에게 “통일될 때까지 어머니 잘 모셔달라”라고 말하는가 하면, 시어머니의 입에 과일을 직접 넣어주는 등 살가운 며느리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2시간이라는 짧은 상봉시간 동안 어머니 이 씨는 손을 뻗어 아들의 얼굴을 재차 쓰다듬었고, 아들 정 씨는 그런 어머니의 손을 아래로 내리더니 꾹꾹 눌러 안마를 해주기도 했다. 상봉 도중에는 어머니 바로 곁으로 다가와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곳 등을 언급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정 씨는 퇴장 시간이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의 휠체어를 직접 밀어주려 했으나 북측은 정 씨의 행동을 곧바로 제지해 안타까운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제20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첫날인 24일 오후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단체상봉에서 이복순 할머니가 납북되 헤어진 아들 정건목씨에게 과자를 먹여주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편, 이날 상봉에는 전시납북자 가족들의 만남도 이뤄져 눈길을 끌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오빠 문홍주 씨(1996년 사망)가 돌연 행방불명돼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던 남측 상봉자 문흥심 씨(83)는 이날 세상을 떠난 오빠 대신 오빠의 아들인 조카 문치영 씨(48)와 조카며느리 리경숙 씨(48)를 만났다.

이들은 첫 만남에 활짝 웃으며 서로 자신을 소개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들 가족의 대화는 주로 누나 문홍심 씨와 함께 온 남측 동생 문연송 씨(76)가 주도했다. 그는 조카 문치영 씨에게 이미 세상을 떠난 형 문홍주 씨의 생전 모습에 대해 물었고, 문치영 씨는 “아버지(문홍주 씨)는 전쟁 3년을 다 치르고 군사복무하다가 57년도에 제대해서 시청전문학교를 다녔다. 학력이 높았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김책공업대학 2기 졸업생이고, 당의 일꾼으로 기술공으로 살아가셨다”고 전했다.

조카며느리인 리경숙 씨도 “(시아버지는) 머리가 좋아서 공부하고 싶다고해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김책공대 보내드렸다. 그때 2기 졸업생 1등했어요”라며 시아버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밖에 문연송 씨는 형 문흥주 씨와 비슷한 시기에 행방불명된 다른 형님들(문흥구·문홍대)의 생사 확인에도 힘을 쏟았다. 이에 조카 문치영 씨는 “큰아버지(문홍구)는 전쟁 때 후퇴가고, 홍대 삼촌은 52년에 평양 방어전에서 총 맞고 전사했다”고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앞서 23일 강원도 속초에 도착했을 당시 문홍심 씨는 6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자상하고 효심이 깊었던 오빠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해냈다. 문 씨는 “어머니보고 시골에서 고생하시고 일하시니까 절에도 다니지 말고 쉬라고 했었다. 나는 천식에 걸렸는데 약도 해주고 내년에 와서 또 해주겠다고 했는데 행방불명됐다”고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던 과거 오빠의 모습을 취재진에 전했다.

문 씨는 취재진 앞에서 북에 있는 오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불렀다는 ‘오빠생각’이라는 동요를 부르면서 오빠를 향한 그리운 마음을 드러냈고, 연이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통일을 염원하기도 했다.

목용재 기자 (morkka@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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