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페이스북
X
카카오톡
주소복사

장성택 주도 2만5천명 숙청 ‘심화조 사건’ 전말이...

김소정 기자
입력 2014.04.26 11:22 수정 2014.04.26 11:23

김정일 집권후 장성택이 복권시킨 채문덕 '광란'

김정일의 삼촌인 김영주 제거 장성택이 전철밟아

북한 김정은 집권 2년만에 고모부 장성택에 대한 숙청과 처형을 단행한 것은 18여년 전 김정일 정권의 출범을 앞두고 벌어졌던 ‘심화조 사건’과 여러모로 맥락을 같이 한다.

김일성 사망 이후인 1996~1998년 지금의 국방위원회 인민보안부에 해당하는 사회안전성 정치국장이던 채문덕이 주도한 숙청작업을 통해 당 간부와 가족 등 2만5000여명이 제거됐다.

앞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74년 후계자 지명 직후부터 계모 김성애와 김평일 등 이복형제들을 곁가지로 몰아 정치무대에서 몰아냈고, 삼촌이자 권력 2인자였던 김영주 당 중앙위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을 제거했다.

아무리 김 씨 일가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집권을 위해 친인척까지 숙청하자 민심이 흉흉해졌고, 김정일은 이를 다잡기 위해 더욱 강력한 공포정치를 단행했다.

김정일은 반발하는 민심을 다스리기 위해 권력층과 일반주민에 이르기까지 전 주민의 출신과 경력에 대한 조사를 심화시켜 나갈 것을 지시했다. 당시 이를 당 조직지도부에서 사법·검찰 부문을 담당하고 있던 장성택 제1부부장이 주도하면서 일명 '심화조'를 구성했고, 이를 채문덕이 진두지휘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중앙당이 당시 사회안전성에 지시를 하달하면서 시작된 심화조 사건은 처음 김일성 가문의 원수인 최 지주의 자녀들과 해방 후 반공활동을 했던 서북청년단을 찾아내는 것에서 시작해 채문덕의 개인 원한을 갚는 일로 확대된 것이다.

심화조 사건을 주도한 채문덕은 간첩을 잡는다는 미명하에 과거 자신의 숙청에 관여했던 문성술 본부당 책임비서와 서윤석 평양시 당 책임비서를 향해 먼저 칼을 빼들었다.

심화조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한 대북소식통은 “아직까지 북한에서 최대의 숙청사건으로 기록되는 심화조 사건은 김 씨 일가의 원한 갚기로 시작돼 권력을 쥔 한 개인의 한풀이로 마감됐다”고 전했다.

장성택이 지난 12월 12일 특별군사재판을 받기위해 국가안전보위부 재판장으로 끌려들어오고 있다. 북한이 공개한 사진이다.ⓒ연합뉴스 장성택이 지난 12월 12일 특별군사재판을 받기위해 국가안전보위부 재판장으로 끌려들어오고 있다. 북한이 공개한 사진이다.ⓒ연합뉴스

채문덕은 당시 중앙당 조직부 행정1부부장이었던 장성택의 도움으로 중앙당 조직부 행정부부장으로 복권됐고, 이후 사회안전성 정치국장으로까지 오른 인물이다.

채문덕은 횡령죄로 이미 교화소에 수감돼 있던 서관희 전 농업담당 비서를 고문해 서관희 자신은 물론 문성술이 서북청년단 부단장이었다고 거짓 진술하게 한다.

채문덕은 문성술을 감금해 심문하던 중 설사약을 먹이고 3일동안 물 한 모금도 안 주는 방법으로 결국 콘크리트 바닥에서 죽게 했다.

또 서윤석도 서북청년단 단원으로 둔갑시켜 이미 6.25전쟁 때 서북청년단 결사대를 이끌고 당시 최고사령부가 있던 평양시 룡성구역 건지리를 습격해 김일성을 죽이려고 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또 주민들을 동원해 룡성구역에 있는 산들을 수색하다가 6.25전쟁 당시 미군이 사용했던 총과 수류탄이 무더기로 발견되자 룡성구역에 살던 70세 전후의 사람들을 대거 잡아들이고 그 가족들은 무조건 18호 관리소로 보냈다.

이때 희생자 중 당시 황해남도 도당 책임비서의 경우 일가족이 모두 관리소로 보내진 이후 여동생은 목매달아 자살하고, 보위부에서 근무하던 둘째 아들은 매맞아죽고, 이에 항의하던 큰 아들과 셋째 아들도 결국 총살됐다고 한다.

심지어 이 사건에 대해 의문을 품은 당시 중앙 검찰소 당 비서도 간첩 혐의로 잡아들여 고문을 하다가 죽이고 그 일가족을 모두 18호 관리소로 보내졌다.

채문덕은 심화조 광풍을 일으키며 결국 당시 함경북도 무산군 상업관리소 소장을 하던 한 여성을 김일성 가문의 원수인 최 지주의 딸로 몰아서 그 일가족까지 모두 잡아들였다. 이 여성은 결국 ‘그 오빠가 한국 국방장관을 지냈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18호 관리소에서는 나이든 사람과 환자는 모두 갱으로 내몰고 젊은 여성들은 강간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김정일은 이런 채문덕에게 공로를 치하하고 공화국 노력영웅칭호를 줬다. 임무 수행을 위해 중앙과 지방에 조직됐던 심화조 요원 전원도 국가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하지만 3년이 못돼 심화조 사건은 모두 채문덕의 공명심과 야망으로 이뤄진 날조로 뒤집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희생됐던 심화조 사건의 후유증이 컸던 탓이다. 간부들 사이에서 ‘김일성 시기에 충실했던 고위급 간부들 대다수가 간첩이고 반당 반혁명분자였으면 어떻게 지금까지 이 나라가 지탱해왔냐’는 항의가 이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김정일은 보위사령부에 지시해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을 전면 재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모든 게 날조라는 사실이 공표되면서 채문덕은 체포돼 심문을 받은 끝에 ‘극악한 살인마’로 지목돼 2000년 7월13일 총살당했다. 심화조 요원 100여명도 제거되거나 출당됐다.

김정일은 심화조 사건의 광풍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고 평양시 옥류관과 평천각 등 큰 식당에서 위로 연회를 차례로 베풀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안전원들은 다 인간백정”이라는 항의성 발언들이 터져나왔고, 연회는 즉각 중단됐다.

한편,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장성택의 처형 이전에 이미 아버지 김정일의 측근으로 김정일의 장례식 때 운구차를 호위한 리영호 군 총참모장을 숙청한 바 있다.

앞서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도 예외가 아니어서 6.25 전쟁 이후 남로당계인 박헌영 제거를 시작으로 1950년대 후반 연안파와 소련파, 1960년대 후반 갑산파를 차례로 숙청했으며 유일영도체계 완성기인 1968년에는 청와대 기습 미수와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침투 실패로 정치적 위기에 처하자 공작을 주도했던 김창봉 당시 민족보위상(현재 인민무력부장)과 허봉학 인민군 총정치국장 등 대남 및 군사 실세들을 숙청함으로써 1인 지배체제를 완성했다.

김소정 기자 (bright@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