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도망쳤다 – 선조의 몽진 [정명섭의 실록 읽기㊸]
입력 2026.09.01 13:50
수정 2026.09.01 13:50
탄금대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한양에 당도한 것은 서기 1592년 4월 29일이었다. 충주까지 뚫렸다는 것은 다음 차례가 한양임을 의미했다. 조정은 공포에 빠졌다. 그리고 선조는 이튿날인 4월 30일 새벽,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왕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수도를 버리고 피난을 결정한 것이 선조 본인인지, 아니면 신하들의 권유를 따른 것인지를 두고 기록은 조심스럽다. 선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4월 30일자 선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새벽에 상이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임금이 도성을 버리는 것을 점잖게 몽진(蒙塵)이라고도 부른다. 파천(播遷)이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그 어떤 표현을 써도 왕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었다. 선조 일행이 한양 도성을 빠져나간 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같은 실록은 임금이 사라진 한양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선조가 몽진을 떠난 출발장소인 창덕궁 인정전 ⓒ직접 촬영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다.
노비 문서를 보관하던 관청들이 먼저 불탔다. 왕이 머물던 궁궐 세 곳도 화염에 휩싸였다. 나중에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했을 때 궁궐은 이미 잿더미였다. 임진왜란 최대의 아이러니 중 하나였다. 백성들이 일본군보다 먼저 궁궐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임금이 사라진 도성에서 억압받던 백성들이 분노를 마음껏 드러낸 것이다. 불타는 도성을 뒤로 한 채 선조 일행은 개성, 평양을 거쳐 결국 압록강 근처의 의주까지 밀려났다. 일본군의 진격이 생각보다 빠르기도 했고, 선조 스스로 명나라로의 망명까지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록에는 선조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을 논의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하지만 신하들이 극력 만류하며 겨우 선조의 망명을 막는다. 망명이 무산된 이유 중에는 명나라의 의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40여일 만에 도성이 함락되고 임금이 의주까지 피난을 와서 국경을 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이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명나라에서는 국경을 넘어오려면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결국, 선조는 명나라 망명을 포기하고 의주에 남기로 한다. 의주에서 선조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간간이 들어오는 전선의 소식을 듣는 것이 전부였다. 방계 왕족이었던 선조는 자신의 권위에 끊임없이 불안을 느끼던 인물이었다. 전쟁은 그 불안을 극도로 증폭시켰다. 선조가 이순신을 계속 견제하고 의병장들의 공을 일관되게 깎아내린 것도 그 불안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많다. 전쟁에서 영웅이 된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뒤 왕권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 선조는 북쪽으로 몽진을 떠난 것이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왕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안 백성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걷는다. 한양의 주막집 주인은 일본군을 따라 온 종군승과 어울리며, 일본식 이름을 짓고, 의병들을 밀고했다. 노비 문서가 불타버리면서 자유의 몸이 된 노비는 그래도 나라를 지키겠다며 의병에 가담한다. 선조가 한양을 버린 시점부터 조선의 백성들은 스스로 전쟁의 주체가 되었다.
일본군의 선봉을 이끈 고니시 유키나가는 텅 비고 불타버린 한양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조선의 국왕을 죽이거나 생포해야만 끝나는 싸움인데 멀리 북쪽으로 도망쳤으니, 앞으로 얼마나 싸워야 할지 걱정이 앞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몰랐던 것은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쳤다고 생각한 조선의 백성들이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뭉쳐서 저항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일본군은 한양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일본군이 물러나고 선조는 폐허가 된 한양으로 돌아온다. 백성들이 태워버리고 남은 궁궐이나 관청들은 일본군의 손에 잿더미가 되었다. 종묘도 불타버리는 바람에 남은 건 월산대군의 저택에 머물러야만 했다. 정릉동 행궁으로 불렸던 그곳은 경운궁으로 불렸다가 훗날 대한제국의 황궁이 된 덕수궁이다.
ⓒ
정명섭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