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퍼링' 없는 정상외교를 위하여 [정상환의 시대읽기]
입력 2026.07.30 07:00
수정 2026.07.30 07:00
정상은 협상의 마무리 짓는 사람
진짜 외교는 회담장 밖에서 이뤄진다
통역은 의미는 옮겨도 공감은 늦춘다
대통령의 영어는 교양 아닌 국익 경쟁력
이재명 대통령이 28일(현지 시간) 브라질 상파울루주 금속노동조합을 방문해 웰링턴 다마스세누 위원장과 대화를 하고 있다. ⓒ뉴시스
대통령이 자신이 진짜 '국가정상(國家頂上)'임을 실감하는 순간은 해외순방일 것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국내에서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야당의 공세를 받고, 여당의 속사정도 살펴야 한다. 지지율에 울고 웃고, 언론의 비판도 감당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지도자라는 사실조차 잊고 지낼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이야기다.
지금 순방 중인 이재명 대통령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당 전당대회, 보완수사권 논란, 부동산 문제, 물가와 증시…. 골치 아픈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그러나 해외에 나가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공항에는 의장대가 도열하고, 상대국 국가원수가 직접 영접한다. 국빈만찬이 열리고 최고의 예우를 받는다. TV 화면만 보면 "대통령 할 맛 나겠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하다.
하지만 카메라가 비추는 장면은 해외 순방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해외순방은 보통 수개월, 길게는 1년 전부터 준비된다.
국빈방문(State Visit), 공식방문(Official Visit), 실무방문(Working Visit), 다자정상회의 등 형태는 다양하지만, 정상회담 의제는 대부분 외교부와 관계부처가 상대국과 오랜 실무협의를 거쳐 상당 부분 정리해 놓는다.
정상은 협상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지막 매듭을 짓는 사람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외순방이 관광은 아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퇴임 후 "가장 기억에 남는 방문국이 어디였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풍경이고 뭐고, 하나도 기억이 없데이."
여러 차례 대통령 해외순방을 수행했던 내 경험으로도 그 말이 진담이라는 것을 안다.
낮에는 정상회담과 기업인 간담회, 국빈만찬과 공식행사가 이어지고, 밤에는 국내 현안을 보고받는다.
몸은 해외에 있어도 온통 촉각은 대한민국을 떠날 수 없다.
해외순방은 외교 일정인 동시에 국내 정치 일정이다.
어떤 때는 해외에 있는 것이 정치적으로 부담을 덜어주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국내 상황이 어수선하면 순방 자체가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정상외교는 국제정치의 무대이지만 그 그림자는 언제나 국내 정치 위에 드리워져 있다.
필자는 오래전 정부답사단 공보담당관과 대통령 해외순방 수행원으로 여러 차례 정상외교 현장을 경험했다.
△클린턴 △미테랑 △헬무트 콜 △옐친 △장쩌민 △만델라 △마하티르 등 세계 정상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거창한 연설보다 그들의 작은 몸짓과 표정이다.
1995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유엔 사회개발정상회의도 그랬다. 110여 개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였다. 회의장은 형식이었고, 진짜 외교는 복도와 커피 브레이크, 만찬장에서 이루어졌다. 서로 웃으며 악수하지만 속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계산했고, 새로운 우군을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정상외교도 결국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언어, 특히 영어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공식회의는 통역이 도와준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은 회의가 끝난 뒤 찾아온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서 있는 몇 분,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는 짧은 시간, 만찬장에서 오가는 농담 한마디가 때로는 회담장보다 더 큰 역할을 한다.
영어가 안 되면 자연스레 대화의 바깥으로 밀려나기 쉽다.
혼밥하거나 홀로 서류만 들춰야 할 경우가 생긴다.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의 순방길에도 글로벌 기업인들과의 만남이 이어졌다.
기술과 투자를 논하는 중요한 자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 시간을 마주 앉았다고 해서 한 시간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대통령이 말하면 통역이 이어지고, 상대가 답하면 다시 통역이 이어진다.
결국 한 시간을 만나도 대통령이 직접 말하는 시간은 15분 남짓이다.
역설적으로 국제외교에서는 진지한 연설보다 스몰토크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작은 유머 하나가 분위기를 바꾸고, 짧은 공감 한마디가 신뢰를 만든다.
진짜 영어가 필요한 순간은 바로 이때다.
상대가 웃으며 농담을 던진다. 통역이 끝난 뒤에야 함께 웃는다. 그 짧은 '버퍼링'이 생기는 순간 농담은 이미 농담이 아니다. 말의 뜻은 전달될 수 있어도 분위기와 타이밍은 함께 전달되기 어렵다.
통역은 의미를 옮길 수는 있어도 감정은 반 박자 늦춘다.
결국 외교는 문장을 번역하는 일이 아니라 공감을 나누는 일이다.
물론 영어를 잘한다고 훌륭한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식회의에서 자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국가의 품격을 지키는 관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국제무대에서 영어는 체면의 문제가 아니다. 국익의 문제다.
통역을 거치면 발언 시간은 줄어들고, 공감은 늦어진다.
외교의 결정적 순간은 준비되지 않은 대화에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자 문화강국이다.
조만간 우리 대통령이 영어로 부담 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
회담이 끝난 뒤에도 환하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도 보고 싶다.
이제는 그럴 때가 되지 않았을까.
대통령의 영어는 교양이 아니다.
국익을 위한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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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상환 환경국립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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