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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38년, 음성 21년 걸렸다…호남 반도체 800조원 딜레마 [세종 백브리프]

배군득 기자 (lob13@dailian.co.kr)
입력 2026.07.01 12:50
수정 2026.07.01 16:14

정부가 추진한 용인도 8년…호남은 '첫 삽' 기약 없어

태양광으론 못 돌리는 24시간 팹

‘지산지소’ 훈풍 뒤에 가려진 인프라 경고음

호남 메가 프로젝트가 마주한 3대 난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생산 공장(팹·Fab)을 전남광주특별시에 짓기로 약속한 29일 오후 하늘에서 바라본 광주 북구 첨단3지구에서 복합단지 조성 사업이 한창이다. 첨단3지구는 두 기업의 반도체 생산 공장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다. ⓒ뉴시스

1988년 금성사(현 LG전자)가 청주산업단지에 첫 삽을 꽂고 38년이 지났다. 이듬해 금성일렉트론이 가동을 시작한 이래, 이 땅은 LG반도체→하이닉스→SK하이닉스로 이어지는 누적 투자 위에 세계 최고 수준의 낸드·HBM·D램 통합 생산 기지로 성장했다.


충북 음성 상우산업단지는 DB하이텍을 앵커 기업으로 2005년 지정됐다. 그러나 경기침체와 토지보상 갈등, 공사 중단을 반복하며 여전히 준공 카우트다운이 밀리고 있다. 공장 하나 짓는 데 꼬박 21년이 넘은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정부는 지난해 12월 대통령 발언 이후 불과 6개월 만에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를 기정사실화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합산 800조원 규모다.


전력·용수·인력 등 핵심 인프라의 확보 방안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입지 결정이 먼저 이뤄졌다는 부분은 반도체에 대한 지식이 조금만 있어도 납득이 안되는 청사진이다. 절차적 역주행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청주와 음성 사례는 반도체 클러스터가 선언만으로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했으며, 수치와 내용은 기자가 검수함.)
청와대發 한마디에 35년 클러스터 생태계를 6개월에 복제


충북 청주 반도체 벨트는 단순히 시간만 쌓인 결과가 아니다. 35년에 걸친 공정 전환, 협력사 정착, 인력 양성, 인허가 학습이 켜켜이 축적된 산업 생태계다. 청주캠퍼스는 현재 첨단 패키징 공장 신설에만 19조원을 추가 투자할 계획다. 이 역시 수년간의 한국전력과 전력 증설 협의를 전제로 한다.


이 역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이재명 대통령의 지난해 12월 ‘에너지원이 풍부한 남쪽’ 발언이다. 이후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 SK그룹 최태원 회장과의 잇따른 청와대 회동을 거쳐 불과 6개월 만에 호남 클러스터 투자가 확정됐다.


재계 내부에서는 “기업 자율이 아닌 정부 주도 투자”라는 말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삼성전자 사장 출신인 국민의힘 고동진 의원은 “정치가 글로벌 일류 기업의 팔을 비틀고 있다”고 직격했다. 야권에서는 연일 “정치가 개입하면 경쟁력이 무너진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비교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는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의 경우, 2023년 3월 발표 이후 정부가 통상 4년의 인허가 절차를 1년 9개월로 단축했다. 착공은 2026년 말, 1호 팹 가동은 2030년을 목표로 한다.


그나마 용인은 LNG 열병합 3GW 신설과 화천댐 연결 방안 등 전력·용수 해법을 먼저 확정한 뒤 착공을 추진하는 구조다. 호남은 이런 단계적 절차도 없이 시작됐다.


주암댐 저수율 28%까지 떨어진 전례가 있다. 이는 팹 1기 용수조차 감당 못하는 수준이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했으며, 수치와 내용은 기자가 검수함.)
송전망은 이미 포화, 주암댐은 바닥…호남이 마주한 3대 인프라 장벽


전문가들이 꼽는 호남 클러스터의 3대 난제는 전력·용수·인력이다. 팹 4기 운영에 필요한 전력 수요는 약 6.3GW, 하루 용수는 65만t으로 추산된다. 충북 청주조차 SK하이닉스 M15X 팹 가동을 위해 한전과 수년간 전력 증설 협의를 벌여야 했던 규모다.


호남이 재생에너지 강점을 내세우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호남 발전설비의 47%를 차지하는 태양광은 야간에 발전량이 급락하는 간헐성 문제를 안고 있다. 24시간 무중단 정밀 공정이 필수인 반도체 팹에는 구조적으로 불리하다.


호남권 345kV 고압 송전망 13곳 가운데 12곳이 2030년까지 수용 부족 상태다. 2031년 이후에는 전체가 한계 용량에 도달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용수 사정도 마찬가지다. 광주·전남 생활·공업용수를 담당하는 주암댐은 과거 저수율 28%까지 급락한 전례가 있다. 현재 수계의 여유 물량은 수만 t 수준에 불과하다. 팹 1기에도 턱없이 모자란다.


이재명 대통령은 호남 용수 부족론에 대해 “호남에도 물은 충분하다”며 “관리 체계가 갖춰지면 하루 100만t 산업용수 공급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황철성 서울대 교수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인력·용수·전력이 핵심인 반도체 입지에서 호남은 유리하지 않다”며 “정치적 결정이 산업 경쟁력을 훼손하는 방식이라면, 우리 스스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퇴장을 선택하는 셈”이라고 경고했다.


결정적 약점은 인력이다. 충북은 35년간 청주 지역 공정 엔지니어와 석·박사급 연구 인력의 생태계를 쌓아왔다. 호남에는 그 기반 자체가 전무하다. 반도체 공정 인력을 단기간에 대규모로 확보할 방안은 현재 어디에도 없다.



대규모 국책사업 발표가 생산 투자보다 토지 시장의 기대감으로 먼저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했으며, 수치와 내용은 기자가 검수함.)
균형발전 훈풍에 올라탄 토지 시장…진짜 수혜자는 누구인가


메가프로젝트 발표 직후 호남 예상 부지 일대에서는 이미 기존 매물이 모두 사라졌다. 현지 공인중개사 사이에서는 “평생 이런 관심은 처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800조원 선언이 기업의 생산 투자로 이어지기 전에, 토지 시장에서 먼저 수혜가 발생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배경이다.


야권 일각에서는 “이재명 정부 공직자와 민주당 의원, 지자체장의 토지 보유 현황을 즉시 공개하라”며 정치권 투기 의혹을 공론화하고 나섰다. 대규모 국책사업이 발표될 때마다 반복돼온 투기 논란이 이번에도 재연되는 양상이다.


여기에 환경단체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전북환경운동연합은 “용인 국가산단을 그대로 둔 채 호남 클러스터를 추가하면, 에너지 지산지소와 송전망 갈등 해소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놓칠 수 있다”며 신중한 검토를 촉구했다. 균형발전이라는 정치적 명분이 에너지 정책 목표와도 충돌할 수 있다는 경고인 셈이다.


충북 음성 상우산업단지는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 걸리는데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고, 얼마나 입지가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2005년 지정 이후 토지보상 갈등과 공사 중단을 반복하다 2025년 12월 준공검사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올해 2월, 충북도에서 산단계획을 재차 변경 고시하면서 여전히 100% 가동을 못하는 상황이다. 산단 지정 20년이 넘도록 아직 최종 완공에 이르지 못한 채 사업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사례를 호남 클러스터 논의의 현실적 기준선으로 제시한다. 황 교수는 “지역 균형발전은 중요하지만, 그게 국가 핵심 산업 경쟁력을 훼손하는 방식이라면 우리 스스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퇴장을 선택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청주 반도체 벨트는 1988년 착공 이후 38년, 음성 상우산단은 지정에서 준공까지 21년, 용인 클러스터는 2019년 투자 발표 이후 첫 팹 가동 목표 시점인 2027년까지 8년을 잡았다.


정부가 호남 클러스터의 전력·용수·인력 인프라 확보 방안과 현실적인 가동 시점을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지 않는 한, ‘800조원 선언’은 계획이 아닌 목표치에 머문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배군득 기자 (lob13@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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