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안 플라자] 조롱보다 무서운 것 -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권력의 개입
입력 2026.05.28 07:00
수정 2026.05.28 07:00
'혐오의 언어' 처리 민주주의 성숙도 가늠
시민사회 도덕적 판단 자정 작용서 이뤄져야
'표현의 자유' 가치, 듣기 좋은 말 들을 권리 X
지레 호들갑 떨며 윽박지르는 것은 능사 아냐
이재명 대통령이 27일 부산 해운대구에서 열린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최 준비 현황 보고회에서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 뉴시스
감당하기 힘든 '혐오스러운 언어'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의해 한 사회의 민주주의 성숙도는 가늠된다.
사회적 합의와 보편적 정서, 혹은 역사적 비극을 정면으로 조롱하고 모독하는 극단적 언사와 마주할 때 권력은 언제나 유혹에 빠진다. 국가의 이름으로 표현을 심판하고, 그 불편한 표현을 공권력으로 제압하고 싶어진다. 대중의 분노를 부추기고 편승해 법적 단죄를 꾀하는 것은 가장 손쉽고 빠른 응징이자 매력적인 정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 사회의 역사는 그 유혹을 떨쳐낸 권력의 절제와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정(自淨)으로 발전해 왔다. 성숙한 공동체와 민주국가들은 아무리 추악한 조롱과 혐오를 마주하더라도 권력의 즉각적 개입보다 공론장의 숙의를 더 신뢰해 왔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1977년 미국 일리노이주의 작은 마을 스코키(Skokie) 사건이다.
당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다수 거주하던 그 마을에 미국 네오나치 단체가 하켄크로이츠 나치 문양을 들고 행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인류 최악의 비극을 경험한 피해자들을 향한 노골적 조롱이자 혐오였다.
스코키시(市)는 집회를 막으려 했지만, 미국 법원은 표현의 자유 원칙을 우선시하며 집회 금지를 허용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결국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표현까지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었다.
결과는 역설적이었다. 집회 당일 광장에 나타난 네오나치 추종자는 불과 수십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을 규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시민은 수천 명에 달했다. 혐오를 밀어낸 것은 국가 권력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압도적 이성이었다. 권력의 강압 대신 공론장의 자정 능력은 혐오를 스스로 고립시키고 왜소하게 만들었다.
물론 모든 민주주의 국가가 미국식 표현의 자유 절대주의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은 나치즘과 파시즘의 역사적 경험 때문에 혐오 선동이나 홀로코스트 부정 등에 일정한 법적 제한을 두고 있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표현을 무한정 용인하면 민주주의가 무너진다'는 방어적 민주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국가 권력이 표현 전체를 검열하고 통제하는 데는 매우 신중하다. 표현의 자유를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좌익 성향 풍자잡지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논쟁이 대표적이다.
종교와 정치, 사회적 금기를 거침없이 풍자해 온 이 잡지는 반복적으로 극단적 논란의 중심에 섰다. 특히 이슬람 풍자 만평은 거센 반발과 끔찍한 테러까지 불러왔다. 그럼에도 프랑스 사회는 기본적으로 표현 자체를 국가 권력이 직접 차단하는 데 매우 신중했다. 그 표현이 저속한지, 무례한지, 공동체의 정서를 해쳤는지는 공론장 안에서 시민과 언론, 시장의 평가를 통해 다투도록 두었다.
프랑스 사회가 이들의 조롱에 동의해서 매대에 두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불쾌할지라도 공권력이나 폭력으로 입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이자, 민주주의의 인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표현의 자유란 결국 내가 동의하는 말을 보호하는 권리가 아니라, 내가 가장 불편해하는 말까지 견디는 인내라는 민주주의적 원칙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우리 대한민국 역시 이런 민주주의적 인내에 익숙하다.
우리는 수많은 왜곡과 과장, 혐오와 조롱이 공론장을 흔들 때도 국가 권력의 직접 개입에는 비교적 신중해 왔다. 광우병 괴담, 사드 전자파 논란, 후쿠시마 수산물 공포처럼 우리 사회를 뒤흔든 과장과 왜곡 역시 적지 않았다. 한국전쟁 북침설이나 각종 역사 왜곡 논란도 오랫동안 반복돼 왔다. 현직 대통령의 누드화와 화형식 같은 극단적 조롱조차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공론장에 등장해 왔다.
그렇지만 우리는 대체로 표현 자체를 형벌로 다스리는 데는 조심스러워했다. 그것이 옳아서가 아니었다.
국가가 '허위'와 '혐오'를 재단하기 시작하는 순간 표현의 자유 전체가 위축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 거친 주장과 조롱 상당수는 시간이 흐르며 시민들의 상식과 과학적 검증, 공론장의 자정 작용 속에서 자연스럽게 힘을 잃었다.
이러한 민주주의 숙성과정 속에서 배운 것은 '표현의 자유'의 진짜 가치는 듣기 좋은 말을 들을 권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혐오하는 말, 공동체의 정서를 거스르는 불편한 표현이라도 공론장 안에서 부딪히고 검증되도록 내버려 두는 인내에 있다.
만약 권력이 심판관을 자처하며 "이 조롱은 처단해야 할 악이고, 저 비판은 허용될 선"이라고 규정하기 시작한다면 표현의 자유는 급속히 위축될 수밖에 없다. 단죄의 기준은 언제나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오늘 혐오를 근절하겠다며 휘두른 칼날은 내일 권력자를 향한 정당한 비판과 자유로운 표현의 영역 전체를 위축시키는 도구로 변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의 '스벅' 논란도 건전한 시민들의 자유로운 소통의 장에 맡겼으면 어땠을까. 오히려 5·18 민주화 정신이 더욱 건강하게 살아났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번 마케팅에 많은 국민이 불편함을 느끼고 외면했다면, 해당 기업은 굳이 최고 권력자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소비자들의 외면 속에 존립 자체가 흔들렸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권력의 개입 없이도 작동하는 공론장과 시장의 무서운 힘이다.
반대로 일정 부분 대중의 호응을 얻었더라도, 국가 권력은 윽박지르고 응징하는 데만 몰두할 일이 아니었다.
왜 일부 시민들이 그 거친 표현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일정한 공감이나 반발 심리를 드러냈는지 살펴봐야 했다. 그 배경에 어떤 사회적 불신과 누적된 감정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함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국민 통합은 단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 설득력 있는 역사적 소통과 일관된 태도, 그리고 공동체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공정성 속에서 완성된다.
모두가 5·18 정신을 온전히 기리도록 정책적으로 보완하여 더 명징한 논리로 많은 국민을 설득해 내는 것이 국가 공권력의 진짜 책임이자 성숙한 정치의 몫이다. 지레 호들갑을 떨며 윽박지르는 것은 결코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사안의 본질은 가려지고 그 미숙한 대처에 대한 거부감과 반발만 거세질 뿐이다.
공동체의 비극을 조롱하고 혐오를 퍼뜨리는 이들은 분명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심판은 어디까지나 시민사회의 도덕적 판단과 공론장의 자정 작용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권력이 표현에 직접 개입해 손쉽게 입을 막기 시작할 때, 민주주의는 법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권위주의를 마주하게 된다.
조롱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조롱을 핑계 삼아 시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권력의 비대화다.
공론장의 자정 능력을 믿지 못하고 국가 권력의 칼날에 의존하려는 사회는 결코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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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정상환 (한경국립대 객원교수)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