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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긴 그림자 [조남대의 은퇴일기(98)]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5.06 14:01
수정 2026.05.06 14:01

우리가 즐겨 마시는 커피 한 잔에는 흙과 햇빛, 수확과 건조의 시간이 겹겹이 포개져 있다. 작은 잔 안에는 커피 빛처럼 깊고 어두운 시간이 스며 있다. 커피 향은 과연 어디에서 시작될까. 답을 찾기 위해 라오스 남쪽의 볼라벤고원으로 길을 떠났다.



‘팍송하이랜드’의 드넓은 커피 농장


시속 50킬로를 넘기지 못하는 고속도로를 따라 느릿하게 달린 끝에 대표적인 커피 농장 ‘팍송하이랜드’에 닿았다. 입구 근사한 카페에서 관광객들은 향이 진한 커피잔을 들고 풍경을 바라본다. 전망대에 오르니 한 키 정도 되는 커피나무가 초록의 끈처럼 멀리까지 이어졌다. 넓이가 9백만 평으로 여의도 열 배에 이른다니 숫자만으로는 짐작이 되지 않는다. 농장 깊숙이 뻗어 있는 도로는 끝이 보이지 않고, 까마득하게 지평선이 멀리 보인다. 커피나무 사잇길을 따라 트럭 한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느릿하게 다가온다. 짐칸에는 어린아이들과 마른 어깨가 그대로 드러난 할머니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경비원이 트럭을 세워 몇 사람을 내리게 한 뒤 짐칸을 살폈다. 커피 열매를 몰래 빼가는 일이 없는지 확인하는 절차라 한다. 꼭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할까.


커피 농장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는 작업자들


잠깐의 정적을 틈타 가이드가 한 할머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하루에 얼마나 따세요?” 할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3킬로”라고 한다. 1킬로에 3천 킵을 받는다니, 하루 품삯이 9천 킵이면 우리 돈으로 고작 몇백 원 남짓이다. 종일 햇볕 아래에서 일한 값은 하루를 버티기에도 빠듯해 보였다. 본격적인 수확 철에도 하루 품삯이 많아야 2,500원 정도란다. 우리 화폐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세계의 여러 생산지에서 반복되는 저임금의 서늘한 뼈대가 드러났다. 어린이와 노인의 고된 노동이 스며든 커피를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 커피 맛은 쓰기만 하다.



수확을 마치고 나오는 작업자들을 내리게 한 후 짐칸을 점검하는 모습


트럭은 다시 느린 속도로 농장을 빠져나갔다. 먼지 속으로 멀어져 상자만 한 크기로 줄어들자, 문득 기억 저편에 묻혀 있던 여름 한복판의 장면이 되살아났다. 중학교 방학을 맞아 대구집에 내려갔을 때였다. 초등학교를 마친 동생은 아이스케이크 통을 메고 골목을 돌며 “아이스케키”하고 외쳤다. 아직은 놀이터가 더 어울릴 나이에 생계를 먼저 배웠다. 몸보다 커 보이던 통은 어깨를 짓눌렀고 웃는 얼굴 뒤로는 땀 줄기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그 모습을 몇 걸음 떨어져 바라보기만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누군가는 벌어야 했다는 걸 알면서도, 형으로서 대신 짊어지지 못했다는 마음이 자꾸만 가슴을 눌렀다. 어쩌면 골목을 오가며 팔았을 몇 개의 아이스케키 값이 내 학비가 되고, 책가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비볐다. 가방 대신 아이스케키 통을 멨던 동생은 이제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두 아들을 장가보내며 누구보다 단단한 삶을 살아냈다. 그러나 한 번 가슴에 새겨진 풍경은 세월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라오스에서 보았던 트럭의 흔들림이 그 여름 골목의 발걸음과 겹쳐 마음 한쪽을 눌렸다.



더운 여름 아이스케키를 팔고 있는 모습·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세계는 넓어졌으나 착취의 풍경은 그리 많이 바뀌지 않았다. 과테말라의 농장에서는 열세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온종일 커피 열매를 따며 쥐꼬리만 한 대가를 받는 현실이 드러났다. 원두는 결국 네스프레소나 스타벅스 같은 거대 브랜드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간다에서는 다섯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아동의 절반 가까이가 커피 생산 과정에서 일하는데 상당수는 농약과 날카로운 도구에 노출되기도 한다. 브라질에서는 불법 노동과 저임금이 반복되며 ‘현대판 노예 노동’이라는 말이 나왔다. 지역과 역사, 문화가 다르지만, 개발에서 소외된 국가의 어린이와 노인의 노동이 가장 약한 고리로 연결되는 구조는 의외로 비슷하다.



빨갛게 익기 시작하는 커피


이런 현실이 지워지지 않는 까닭은 커피 생산이 대부분 소규모 가족농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농장주가 충분한 이익을 얻지 못하니 가족 구성원이 노동력으로 투입된다. 특히 어린이가 학교 대신 농장을 선택하게 되는 순간, 가난은 대를 이어 굳어진다. 커피는 농장에서 소비자에게 오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며 값이 불어난다. 대형 다국적 기업이 커다란 수익을 챙기고 나면, 농가에 돌아가는 몫은 얼마 남지 않아 악순환의 사슬이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동생에게 미안해하던 그 여름 역시 비슷한 사슬이 존재했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가 벗어났을 뿐이다.


거피 농장에 마련된 야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관광객


전망대 아래 카페에서는 커피 향이 한층 진했다. 사람들은 웃고 사진 찍고 기념품을 고른다. 노동과 커피 향 사이의 거리가 그토록 멀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커피를 포기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지 않은가. 누군가는 농장에서 생계를 이어가야 하고, 어떤 이는 교육의 기회를 통해 다른 내일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건 공급망의 투명성과 노동의 정당한 대가다. 결국 어떤 손이 얼마를 받느냐는 문제가 아닐까.


카페에서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하는 모습·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언제부턴가 우리는 커피를 습관처럼 마신다. 오늘은 커피 한 잔에 사람의 노동이 또렷이 겹쳐 보였다. 어린 시절, 아이스케이크 통을 메고 다니던 동생의 모습처럼, 라오스의 커피에도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아이들의 희생이 스며 있는지도 모른다. 그 아이 역시 언젠가는 지난날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그땐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고 커피 한 잔에 담긴 꿈과 땀이 공평하게 나뉘는 세상이면 좋겠다. 팍송의 저녁 햇살은 농장 끝에 걸린 채, 한걸음 앞에서 마음이 멈춘 듯 보였다.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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