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중남미 공든탑’이 허물어지고 있다
입력 2026.03.01 08:00
수정 2026.03.01 08:00
美, 마두로 축출 2개월 채 안 돼 베네수엘라 원유 공급받아
베네수, 탄화수소법 통과로 中, 값싼 원유구매 사실상 막혀
파나마, 운하 운영권 소유 선언으로 中 영향력 약화 불가피
美, 베네수 등 승리 여세 몰아 ‘목구멍 가시’ 쿠바 옥죄기에
니콜라스 마두로(가운데)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지난 1월5일 미 마약단속국(DEA) 요원들에게 이끌려 뉴욕 연방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중국이 ‘활수’(滑手) 좋게 돈을 쓰며 구축한 중남미의 교두보가 속절없이 와해되고 있다. 베네수엘라에 대해서는 미국 특수부대의 군사 작전으로, 파나마에는 외교적 압박울 통해 주도권을 장악한 미국이 에너지난으로 비틀대는 쿠바를 정조준하면서 중국이 중남미에 애써 쌓아올린 ‘공든탑’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을 몰아낸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베네수엘라로부터 대규모 원유를 공급받은 사실을 밝혔다고 미 CNN방송 등이 지난 24일 보도했다. 그는 이날 국정연설을 통해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60만 배럴(1배럴=0.1538t) 이상 증가했으며, 우리의 새로운 친구인 베네수엘라로부터 8000만 배럴이 넘는 원유를 공급받았다"고 발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언급은 크리스 라이트 미 에너지부 장관이 베네수엘라를 방문해 델시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과 회담하고 현지 원유 생산시설을 둘러본 직후 나왔다. 베네수엘라는 원유 매장량이 3038억 배럴로 추정돼 세계 1위 수준인 만큼 체제 안정과 석유산업 재건은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마두로의 전임자인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2007년 국유화 정책을 실시한 후 대부분의 외국 석유 기업은 현지에서 철수한 바 있다.
‘마약 소탕’을 명분을 내세운 미국은 앞서 지난달 3일 미군 특수부대 델타포스의 군사 작전을 통해 마약밀매 혐의로 기소된 마두로 당시 대통령을 체포해 미국으로 압송했다. 그는 현재 미국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상과는 달리 마두로 정권의 부통령 출신인 델시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이 이끄는 과도 정부와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마코 루비오(오른쪽 세번째)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해 2월2일 파나마 수도 파나마시티의 파나마운하를 방문해 미라플로레스 갑문을 둘러보고 있다. ⓒ AP/뉴시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베네수엘라 국회는 지난 1월29일 정부가 제출한 탄화수소법 개정안을 가결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에 본사 주소지를 둔 민간 기업은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PDVSA)와 일정한 계약을 체결할 경우 석유·가스 탐사, 채굴, 채취, 운송, 저장, 가공, 정제, 상업화 등 활동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법안이 발효되면 외국·현지 기업들은 향후 새로운 계약을 통해서 유전을 운영하고 생산물을 상업화할 수 있게 된다.
베네수엘라 국회가 법안을 가결한 직후 미국은 즉각 베네수엘라 석유산업 제재를 완화했다. 이로 인해 중국이 대량 구매해왔던 베네수엘라산 석유는 미국 등 서방 국가에 공급될 전망이다. 이에 중국 국유기업 중국석유(中國石油·PetroChina)는 베네수엘라산 원유 구매를 전면 중단했다. 중국석유는 미국의 통제권 안에 들어간 베네수엘라 원유 가격을 문제 삼아 주문을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그동안 국가개발은행(國家開發銀行·CBD)을 통해 베네수엘라에 600억 달러(약 86조 4000억원) 규모를 빌려주고 이를 원유로 상환하는 하는 방식으로 베네수엘라산 초중질유를 저렴한 가격으로 도입해왔다. 경질유에 비해 정유가 쉽지 않은 초중질유에 특화한 설비를 갖춘 중국은 국제가격보다도 훨씬 싼 값에 베네수엘라 원유를 확보하는 특혜를 누려왔다.
미국의 제재를 피해 베네수엘라 원유를 시장가보다 배럴당 10~20달러 저렴한 가격에 대규모 수입한 것이다. 중국은 지난해 하루평균 39만 5000만 배럴 규모의 원유를 베네수엘라에서 수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전체 원유 수입량의 4~5% 정도에 달한다. 값싼 베네수엘라산 원유 수입의 길이 사실상 막히면서 중국은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지난 1월30일 쿠바 수도 아바나 인근 바쿠라나오의 한 주유소에서 한 운전자가 오토바이에 주유하는 가운데 다른 운전자들이 길게 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 AP/뉴시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산둥(山東)성 일대 중소 정유사들은 베네수엘라산 원유의 주 수입원이다. 얇은 이윤 마진을 저렴한 제재 유류로 메꾸어온 이들은 베네수엘라산 원유 공급이 끊기자 가동 중단 위기에 처했다. 더욱이 저렴한 가격으로 들여온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아시아 시장에 덤핑 수준의 값으로 내다팔아 쏠쏠하게 챙겼던 돈벌이도 없어지게 됐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파나마 정부가 23일 파나마 운하에 있는 항구 두 곳의 운영 통제권을 갖겠다는 내용을 담은 포고령을 발표했다. 이 항구는 홍콩에 본사를 둔 기업이 운영권을 갖고 있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파나마 정부는 포고령을 통해“파나마 운하에 있는 항구 두 곳을 점유하라”며“파나마 해사청이 긴급한 사회적 이익을 이유로 항구를 점유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밝혔다.
점유 대상에는 발보아 및 크리스토발 터미널 내부 또는 외부의 모든 이동 가능한 자산이 해당된다. 여기에는 크레인과 차량, 컴퓨터 시스템 및 소프트웨어가 명시적으로 포함된다. 파나마 정부의 이번 조치는 파나마 대법원이 홍콩 재벌 리카싱(李嘉誠) 청쿵(長江·CK)그룹 창업자 일가의 주력 회사인 CK허치슨홀딩스(長江和記實業公司)가 파나마 운하 운영권을 보유한 게 위헌이라고 최종 판결한 데 따른 것이다.
파나마 대법원은 지난달 CK허치슨 자회사인 파나마 항만공사(PPC)의 항만 운영권 계약을 승인한 법률을 무효화하고 2021년 체결된 운영권 연장 계약 역시 효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파나마 항만공사의 항만 운영은 법적 근거를 완전히 잃게 됐다. CK허치슨은 지난해 3월 해당 항만 운영권을 미 투자회사 블랙록이 포함된 컨소시엄에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중국 정부의 개입으로 거래가 중단된 바 있다.
ⓒ 자료: 중국 국가통계국 등
중국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중국 정부는파나마 운하와 중국을 연결하는 듯한 미국 측 주장이 “중국과 중남미의 협력을 왜곡하는 동시에 중국과 파나마 관계를 훼손하려는 비열한 시도”라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중국을 운하 운영에 관여한 것처럼 날조하는 연계 시도는 즉각 중단해야 한다”며“미국이 패권적 본성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중국이 공식적으로는 CK허치슨과의 연관성을 부인했으나, 파나마 정부의 이번 결정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베네수엘라와 파나마에서 손쉽게 ‘승리’를 거둔 미국은 내친 김에 ‘목구멍의 가시’ 같은 존재인 쿠바 옥죄기에 들어갔다. 미국의 원유 수출봉쇄로 에너지가 고갈된 쿠바의 일상이 사실상 마비된 것이다. 쿠바 정부는 ▲대중교통 운행 제한 ▲대학 비대면 수업 ▲근무시간 단축 등의 비상조치를 시행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6일엔 국영 기업의 주 4일 근무제 도입과 연료 판매 제한 등의 긴급조치도 실시했다.
다만 미 정부는 25일 쿠바 상대 금수 조치를 일부 완화했다. AFP에 따르면 미 재무부는 이날 베네수엘라산 석유가 인도주의적 용도로 쿠바의 민간 부문에 수출될 수 있도록 허용키로 했다. 쿠바의 극심한 경제위기가 카리브해 연안 전체에 불안정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에 따른 것이다.
쿠바는 전체 에너지 수요의 3분의 2를 수입에 의존해 왔는데, 대부분을 의지하던 베네수엘라산 석유 수입이 지난해 말 급감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 인근 해역에서 제재 대상 유조선 출입을 봉쇄한 탓이다. 이마저도 마두로가 체포된 이후 아예 끊겼다. FT는 “쿠바의 석유 비축량은 15~20일치 밖에 없다”고 전했다.
ⓒ 자료: 중국 국가통계국 등
이처럼 극심한 에너지난을 겪고 있는 쿠바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곳은 미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기 취임 첫날인 지난해 1월20일 쿠바를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한 후 제재안을 지속해서 내놨다. 지난달 29일엔 쿠바와 원유 거래 국가에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베네수엘라 다음으로 정권 교체를 할 나라로 쿠바가 꼽히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5일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이 미국과 대화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는 발언에도 반응하지 않고 있다.
미국의 봉쇄로 ‘대미(對美) 전초기지’인 쿠바의 석유 재고가 몇 주분 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식에 다급해진 중국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겠다”며 연료 부족 사태를 맞은 지원을 약속했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5일 베이징에서 브루노 로드리게스 쿠바 외무부 장관과 회담을 갖고 역량 범위 내에서 지원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지난 달 쿠바에 쌀 6만t과 8000만 달러 규모의 긴급 지원금을 제공하기로 했다.
린젠(林劍) 외교부 대변인은 11일 정례 브리핑을 통해 “중국은 쿠바의 국가 주권과 안보 수호를 확고히 지지하며 외국의 간섭에 반대한다”며 쿠바를 측면 지원했다. 그는 “중국은 쿠바 국민의 생존과 발전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는 어떠한 행위나 비인도적인 행위에도 단호히 반대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은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해 쿠바에 지원과 원조를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