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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소비'하지 않고 '사유'하는 관객들…생태계 기초 체력 다진다 [관객 주체형 상영 문화③]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1.24 07:19
수정 2026.01.24 07:20

"소수 정예 상영관에서는 영화 매개로 더 솔직해진다"

김은 대표 "영화 생태계 변화, 다양성과 함께 중요"

상업·행정 논리에서 벗어나 개인과 커뮤니티가 자율적으로 조직한 영화제와 상영회는 성과나 규모보다, 사람이 어떻게 모이고 그 관계가 어떻게 유지되는가에서 의미가 드러난다. 이들 움직임의 공통점은 영화를 단순히 ‘보는 콘텐츠’로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함께 보고 난 뒤의 대화와 취향의 공유를 핵심 가치로 삼는다는 점이다.


제도권 영화제가 축소되고 극장 접근성이 낮아진 환경 속에서, 영화는 다른 방식으로 관객과 다시 연결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아담 대표이자 ‘이 중에 네가 좋아하는 영화제 하나는 있겠지’ 저자인 김은 대표는 이러한 흐름을 기존 영화제의 ‘대안’으로 규정하기보다, 관객과 영화의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으로 바라봤다. 김 대표는 “누군가가 ‘이 영화를 봐야 한다’고 정해주는 구조에서 벗어나, 관객이 스스로 가고 싶은 공간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하는 흐름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며 “영화제는 그런 선택이 가능해지는 장소”라고 말했다.


ⓒ데일리안 AI 삽화 이미지



이 같은 변화는 가장 작은 단위의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다. 2018년부터 ‘호러무비클럽’ 상영회를 운영해온 김태경 씨의 사례는 관객 주체형 상영 문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 씨가 상영회를 시작한 계기는 거창한 기획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공포영화를 추천할 때마다 작품의 맥락이나 의미를 설명하기도 전에 거부당했던 반복된 경험이었다.


그는 소셜 플랫폼을 통해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직접 찾아 나섰고, 그렇게 모인 소수의 인원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늘어나 특정 장르를 중심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관람 공동체로 자리 잡았다.


이 상영회의 특징은 공포영화를 자극적인 오락물로 소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해석과 토론의 대상으로 끌어올린다는 점이다. 상영 이후 진행되는 대화를 통해 참여자들은 공포영화에 내재된 연출 기법과 사회적 맥락을 함께 읽어내며, 관객은 일방적인 소비자에서 스스로 의미를 구성하는 해석 주체로 이동한다.


김은 대표는 이러한 구조가 대형 극장 체제에서 점차 사라졌던 ‘대화의 문화’를 회복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다수가 모이는 상영관에서는 주류 의견에 휩쓸리기 쉽지만, 소수 정예로 모이는 자발적 상영회에서는 영화를 매개로 훨씬 솔직하고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해진다”며 “소수의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비슷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유기적인 연대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관객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누는 환경은 상업적 흥행 논리에서 밀려났던 장르와 작품을 다시 꺼내놓는 조건으로도 이어진다. 멀티플렉스 중심의 상업 환경에서 설 자리를 잃기 쉬운 영화들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경로로 기능하는 셈이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장르 기반 상영회나 취향 중심 모임은 관객을 단순히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 스스로 자신의 취향을 언어화하고 공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하다”며 “이는 영화 생태계의 저변을 유지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흐름은 장르 중심 상영회를 넘어, 미디어를 기반으로 형성된 취향 공동체의 확장으로도 나아간다. 디에디트 영화제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디에디트는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걸친 콘텐츠 큐레이션을 통해 축적한 ‘추천의 신뢰’를 바탕으로, 독자 공동체를 오프라인 상영 공간으로 불러냈다. 경쟁이나 성과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 직접 영화를 고르고 관객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설계된 이 영화제는 확장된 커뮤니티 경험에 가깝게 작동했다.


다만 이러한 민간 상영 문화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제도권 영화계의 회복이 전제돼야 한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호러무비클럽’의 김태경 씨는 “최근 극장가에서는 신작 개봉 편수가 줄어든 가운데, 검증된 흥행작이나 과거 작품의 재개봉이 반복되며 상영 일정이 채워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비인기 장르나 다양성 영화의 신작은 상영 기회를 확보하기 어려워졌고 소규모 상영회 역시 과거 작품 위주의 프로그램을 구성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직면해 있다”라고 전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지역으로 확장될 경우, 역할은 더욱 구체화된다. 안동헤리티지영화제 권미정 홍보팀장은 “지방의 경우 시민 주도로 만들어지는 영화제는 수도권 바깥 지역에서 영상 문화의 기반을 다시 다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이미 영화를 보던 사람만 보고, 만들던 사람만 만드는 구조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문’ 같은 역할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취미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일부로 연결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김은 대표 역시 지역 기반 영화제가 갖는 의미를 ‘콘텐츠의 규모’보다 ‘관계의 밀도’에서 찾았다. 그는 “서울을 중심으로 영상 산업이 집중된 환경과 달리, 지역 영화제에서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직접 만들고 기록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며 “이런 영화들은 상업 극장에서 쉽게 접하기 어렵지만, 지역에서는 오히려 영화의 또 다른 얼굴로 작동한다. 관객이 정해진 프로그램을 소비하는 대신, 자기 취향에 따라 영화를 선택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관객이 기반이 되는 지역 영화제는 중요한 접점”이라고 짚었다.


영화계 관계자들은 이 같은 사례를 기존 영화제의 대체가 아닌, 영화 관람 방식이 다층화되는 과정으로 해석한다. 상업·행정 중심의 영화제가 감당하지 못하는 영역을 개인과 커뮤니티가 각자의 방식으로 보완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은 대표는 “이 과정에서 관객은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데 익숙해지고, 영화와의 관계도 더 깊어진다. 규모가 작더라도 영화를 매개로 모여 대화를 나누는 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있다”며 “이러한 변화가 지금 영화 생태계에서 다양성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했다.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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