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영우 "한국판 '오세이사', 원작보다 더 진한 원색의 정서가 매력" [D:인터뷰]
입력 2025.12.28 13:41
수정 2025.12.28 13:41
드라마와 영화 제작 시장이 위축됐다는 평가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배우 추영우만큼은 예외에 가까웠다. ‘옥씨부인전’을 기점으로 ‘중증외상센터’, ‘광장’을 거쳐 ‘견우와 선녀’까지, 화제작의 흐름 속에는 언제나 그의 이름이 있었다. 한 작품 안에서 상반된 인물을 오가고, 조력자와 빌런,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들며 역할의 스펙트럼을 넓혀온 시간이었다.
여기에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이하 ‘오세이사’)로 스크린 주연까지 더하며, 추영우는 자신만의 유의미한 궤적을 쌓아가고 있다.
ⓒ
이치조 미사키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오세이사'는 동명의 일본 영화를 한국적 정서로 재해석한 리메이크 작품이다. 자고 일어나면 기억이 사라지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는 여학생과,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남학생의 만남을 통해 풋풋하면서도 애틋한 사랑의 시간을 그려낸다.
추영우는 극 중 삶의 뚜렷한 목표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김재원 역을 맡았다. 겉으로는 시니컬하고 다소 우울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인물이다. 영화는 김재원이 사랑 앞에서 조금씩 변화해 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인물의 감정과 결을 차분하게 쌓아 올렸다.
‘오세이사’는 올해 7월 촬영을 시작해 12월 24일 개봉까지 약 6개월 만에 완성됐다. 제작과 개봉 사이의 간격이 길어지는 최근 극장 환경에서는 비교적 빠른 일정이다.
“촬영부터 개봉까지 정말 빠르게 진행됐어요. 촬영도 금방 끝났고, 후반 작업도 감독님이 정말 많이 노력해 주셔서 속도가 굉장히 빨랐죠. 개봉일도 크리스마스 이브로 맞추기 위해 어른들이 많이 애써주셨고요. 배우 입장에서는 그런 과정 자체가 너무 감사한 일이에요.
이처럼 빠른 제작 일정 속에서 그는 배우로서 극장 개봉작이 지닌 감각을 처음으로 온전히 체감했다. 스크린 앞에 앉아 자신의 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경험은, 촬영 현장과는 또 다른 종류의 긴장과 집중을 요구하는 순간이었다. 관객의 시선이 한 공간에 모이는 영화관이라는 환경은 그에게 연기의 밀도와 무게를 다시 인식하게 했다.
“영화관에서 제 영화를 처음 제대로 보면서 느낀 게 있어요. 아주 사소한 연기여도 관객들이 집중해서 봐준다는 점이요. 그 공간에서 끝까지 함께 봐야 한다는 점이 배우로서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한편, 관객의 반응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조심스럽다. 작품을 둘러싼 평가에 즉각 반응하기보다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상황을 바라보려는 쪽에 가깝다. 다만 언젠가는 관객 사이에 섞여 직접 반응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작은 바람도 품고 있다. 첫 극장 개봉 주연작을 맞이한 지금, 그 역시 관객을 만나는 방식에 대해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가는 중이다.
“반응은 일부러 찾아보는 스타일이 아니라 아직 직접 보진 못했어요. 시사회나 무대 인사는 지인들이 많다 보니 좋은 이야기만 해주시고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게 하나 있는데, 조만간 제가 직접 예매해서 영화관에 가서 모자 쓰고 엘리베이터나 화장실에서 관객 반응을 몰래 들어보려고 해요. 아직은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있습니다.”
ⓒ
원작이 존재하는 작품에 참여하는 일은 그에게 자연스럽게 책임감을 동반했다. 소설과 일본 영화로 이미 형성된 정서와 기억을 알고 있었던 만큼,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연기로 옮길지에 대한 고민도 뒤따랐다.
“대본을 받기 전부터 원작 소설도 읽었고 일본 영화도 봤어요. 정말 재미있게 봤고, 보면서 울기도 했어요. 그래서 부담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원작을 좋아한 분들이 분명히 보러 오실 거라고 생각해서 고민도 많았고요.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과연 이 소설 속 캐릭터와 내가 어울릴까’였어요. 그래도 감독님과 제작진이 저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으려고 했고, 스스로도 자신감을 가지려고 노력했어요.”
재원이라는 인물을 설정하는 데서 가장 중요했던 건 과하지 않게 만드는 일이었다. 해석을 더할수록 인물이 튀어 보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재원을 평범한 고등학생의 범주 안에 두고, 말투와 태도 같은 디테일로 인물의 결을 만들어갔다.
“리메이크 작품이다 보니 싱크로율을 따지는 게 당연하잖아요. 저 역시 영화를 볼 때 그런 걸 신경 쓰는 편이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일본판 배우와 비슷하게 가보려고도 했어요. 살도 더 빼고, 머리도 길러보고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안 어울리더라고요. 그 느낌이 아니었어요. 애매하게 따라 하기보다는, 차라리 제가 생각한 재원대로 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제가 잡은 방향은 아주 평범한 남자 고등학생이었습니다. 특별한 감성을 담으려고 하기보다는, 그 나이 또래 남자아이들이 할 법한 머리, 말투, 태도를 떠올렸어요. 제 학창 시절 모습도 많이 참고했고요. 결과적으로 화면에 나온 재원은 저랑 굉장히 비슷한 인물이라고 느껴요. 그리고 재원에게는 서윤이가 가장 중요한 존재잖아요. 그래서 다른 어떤 것보다 서윤과의 관계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아요.”
극중 김재원은 심장병을 앓고 있는 인물로 설정돼 있다. 원작에도 등장하는 이 설정은 영화 전반의 감정선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다만 캐스팅 단계부터, 또 작품 공개 이후에도 인물의 설정과 배우의 외형 사이의 간극을 언급하는 반응이 일부 이어졌다.
“촬영 전에는 최대한 덜 건강해 보이려고 노력했어요. 후반부에 아픈 설정이 나오더라도 충격이 덜했으면 했거든요.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체중이 88kg 정도였어요. 두 달 정도 운동을 거의 안 하고 감량했는데, 생각만큼 빠지지는 않더라고요. 게다가 야외 촬영이 많다 보니 햇빛에 타서 더 건강해 보이기도 했고요. 핏줄 얘기도 많이 하시는데, 그건 거의 유전이에요. 운동을 안 해도 그런 편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어요. 촬영 시작은 80kg대, 끝날 무렵에는 75~76kg 정도까지 감량했습니다.”
영화는 재원이 심장병을 가졌다는 설정을 전면에 드러내기보다, 서사의 중심을 서윤의 하루가 반복해서 리셋되는 구조에 두는 쪽을 택했다. 반전을 앞세우기보다 감정의 흐름을 흔들지 않겠다는 판단이 반영된 선택이다.
“재원이 아프다는 설정을 얼마나 드러낼지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배우들, 감독님과 계속 이야기했고요. 결국 촬영 직전까지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은 ‘아예 넣지 말자’였어요. 중간에 힌트를 주면 오히려 관객이 헷갈릴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서윤의 하루가 매일 리셋된다는 설정이라고 봤어요. 저는 그 하루를 지켜주고, 채워주고, 기억해내는 역할에 집중하고 싶었어요.”
재원과 서윤의 관계를 연기하는 과정에서 배우 간의 호흡은 중요한 조건이었다. 대사가 많지 않은 장면과 짧은 신들이 이어지는 구조였기 때문에, 촬영 현장에서는 장면마다 표현 방식을 두고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이 많았다. 이러한 작업 방식 속에서 현장의 분위기와 협업 과정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신시아 누나와의 호흡은 정말 최고였어요. 대사가 많지 않은 장면에서도 제가 이것저것 시도하면 다 받아줬고, 짧은 브릿지 신에서도 ‘이거 어때요? 괜찮아요?’ 하면서 굉장히 세심하게 의견을 나눠줬어요. 촬영장 분위기도 네 명의 배우와 감독님까지 포함해서 서로 많이 아껴주고, 먹을 것도 잘 챙겨주고 정말 좋았어요.”
이 작품을 준비하며 연기의 강도에 대해 여러 판단이 오갔다. 주연으로서 장면을 끌고 가야 한다는 생각과, 영화가 요구하는 톤 사이에서 기준을 조정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저는 신인이다 보니 연기할 때 ‘내 존재감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이 늘 있어요. 주연이라면 더더욱 지루하지 않게, 맛깔나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고요. 그런데 이번 영화는 자극적인 사건도 없고, 요즘 말로 도파민이 터지는 작품도 아니잖아요. 현장에서는 어떻게든 뭔가 더 하려고 애드리브도 해봤는데, 감독님이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개인적으로 아쉬웠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정서와 톤이 쌓이면서 만들어지는 분위기가 있더라고요. 감독님의 선택을 더 믿게 됐습니다.”
영화는 원작의 가족 설정 일부를 덜어내고, 부자 관계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원작에 있던 누나 캐릭터와 갈등 구조를 제외하는 대신, 어머니를 잃은 이후의 상실을 아버지와 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감내하며 관계를 이어가는 서사로 방향을 정했다. 이 변화는 극적인 사건보다 생활의 흐름 속에서 인물의 상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김재원이 집안일을 자연스럽게 해내는 모습 역시 이런 설정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영화는 빨래를 개고, 요리를 하고, 과일을 손질하는 일상의 행동을 통해 인물이 살아온 시간과 책임을 설명한다.
“부자 관계를 각색해서 개인적으로 그 부분은 원작보다 더 슬펐어요. 조한철 선배님과의 연기가 정말 행복했고, 선배님이 진짜 아빠처럼 느껴졌어요. 빨래 개는 장면도 그냥 넘어가기보다는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서 집에서 검색해서 연습했어요. 반면 사과 깎는 건 정말 못해요. 소품팀에서 다칠까 봐 무딘 칼을 주셔서 더 안 깎이더라고요.”
한국판 ‘오세이사’는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정서와 환경을 한국적인 맥락으로 옮겨왔다. 인물 구성과 관계, 공간과 배경 역시 이에 맞춰 새롭게 설계됐다. 이러한 변화가 작품의 분위기와 감정 결을 새롭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추영우 자신감을 드러냈다.
“한국판은 조금 더 원색에 가까운 정서라고 생각해요. 원작에는 없는 호은이라는 친구도 등장하고, 가족 관계나 공간, 배경도 많이 바뀌었어요. 한국 학생들이 실제로 할 법한 데이트, 방학 같은 장면들이 많아서 아예 다른 작품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배우 추영우는 안판석 감독이 연출하는 드라마 ‘연애박사’ 출연을 확정지었다. 극 중 그는 골육종으로 왼쪽 다리를 잃은 뒤 수영선수의 꿈을 접고, 기계공학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박민재 역을 맡는다. 또 다른 결의 인물을 통해 그가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관심이 모인다.
“장르는 가리지 않고 다 도전해보고 싶어요. 결과적으로 로맨스를 많이 하고 있지만,작품마다 결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지금 앞에 있는 작품들도 정말 잘 해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