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반도체의 최종병기’ EUV 노광장비 비밀리에 개발
입력 2025.12.28 07:30
수정 2025.12.28 08:11
中, EUV 노광장비 시제품 제작, 비밀리에 시험가동 들어가
美, ‘반도체 굴기’ 저지 위해 中에 판매금지한 최첨단 장비
中, 메모리·AI칩에 이어 반도체 장비 분야서도 자립 가능성
EUV 장비생산 필수부품 구하기 어려워 개발에 한계 지적도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0월30일 부산 김해공군기지 의전실 나래마루에서 미·중 정상회담을 마친 뒤 회담장을 나서며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중국이 최첨단 반도체 칩 생산에 필수적인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프로토타입(prototype·시제품)을 제작해 비밀리에 시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EUV 노광장비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 생산하는 반도체 최첨단 장비다.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崛起)를 저지하기 위해 ASML EUV 노광장비의 중국 판매를 금지하는 바람에 첨단 반도체 생산에 극심한 차질을 빚은 중국이 EUV 노광장비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반도체 자립을 위한 ‘기술적 이정표’를 세웠다는 관측이 나온다.
EUV 노광장비 프로토타입은 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의 최첨단 보안 연구시설에서 올해 초 완성돼 시험 단계에 들어갔다고 로이터통신이 지난 17일 보도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 역시 중국이 네덜란드 ASML의 EUV 노광장비 중고 제품을 해외에서 들여와 자국 내 장비에 설치하는 방식으로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다고 19일 전했다.
이 노광장비 프로토타입은 이미 EUV 광원을 성공적으로 생성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는 “이 EUV 노광장비 개발사업은 ‘중국판 맨해튼 프로젝트’(미국의 원자폭탄 개발계획)로 불린다”며 “ASML 노광장비보다 조잡하지만, 시험 가동은 가능한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반도체 칩을 생산하는 단계까지 3~5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섣부른 전망도 나온다.
글로벌 반도체 전문가들은 메모리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칩 등 반도체 부문 전반에서 자체 기술을 축적해 온 중국이 생산장비 분야에서도 자립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중국이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차세대 메모리부터 AI 칩에 이어 생산장비에 이르기까지 ‘반도체 굴기’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2023년 11월20일 네덜란드 펠트호번에 있는 ASML 본사에서 엔지니어들이 최첨단 하이-NA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앞을 지나가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중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업체 창신춘추(長鑫存儲·CXMT)는 4세대 HBM 개발해 내년 본격 양산에 돌입할 예정이다. 미·중이 명운을 걸고 맞붙은 AI 칩 분야에서는 “중국이 우리를 따라잡았다”고 미국이 인정할 정도다. 화웨이(華爲)가 AI 칩 어센드 910C 384개를 탑재해 만든 서버시스템 ‘클라우드 매트릭스 384’가 엔비디아의 유사 제품인 ‘NVL 72’와 성능이 거의 같다고 판단돼 미 정부가 엔비디아 AI 칩 H200의 중국 수출을 허용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말마저 흘러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세계 반도체 업계에서는 그동안 중국이 EUV 기술을 구현하는 데 최소 10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4월 “중국이 이 기술을 개발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광원과 광학계(거울), 진공시스템 등 모든 시스템이 원자 단위의 정밀도로 동시에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ASML는 “우리 기술을 복제하려는 시도가 나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를 구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중국은 시험 중인 이 장비를 활용해 오는 2028년까지 실제 작동하는 반도체 칩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반도체는 웨이퍼 위에 아주 얇은 층을 여러 개 쌓아 놓은 것 같은 형태로 구성된다. 이 미세한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빛으로 설계도를 그리는 DUV 및 EUV 노광장비가 필수적이다. 노광장비는 머리카락보다 수천배 얇은 반도체 회로를 실리콘 웨이퍼 위에 빛으로 새겨 넣는다.
DUV(심자외선)는 빛의 파장이 길어 7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까지는 가능하지만 5나노 이하 공정에서는 수율이 잘 나오지 않는다. 빛을 여러 번 쏴(Multi-patterning·다중 패터닝) 가는 회로 설계도를 그릴 수는 있지만, 이 과정에서 오류가 날 수 있는 탓에 생산된 반도체 불량률이 높은 것이다. 반면 5나노급 이하의 최첨단 반도체 공정에는 빛의 파장이 짧은 EUV가 반드시 필요하다.
네덜란드 펠트호번에 있는 ASML 본사의 로고. ⓒ AP/뉴시스
중국이 DUV를 업그레이드한다고 해도 EUV만큼의 수율은 나오지 않는 탓에 정부의 보조금 없이는 경제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에 비해 최첨단 장비인 EUV는 13.5나노급 파장의 빛을 쏴 5나노급 이하의 정밀 회로를 새기는 만큼 초미세 공정에 빼놓을 수 없다. EUV 장비를 유일하게 만들 수 있는 ASML이 반도체 업계의 ‘슈퍼 을(乙)’로 불리는 이유다.
대당 가격이 무려 2억 5000만 달러(약 3706억 5000만원)가량인 ASML의 EUV 장비는 미 반도체 업체 엔비디아·AMD가 설계하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삼성전자·대만 TSMC·미 인텔이 생산하는 최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이다. ASML은 2001년 첫 EUV 프로토타입을 제작한 이후 2019년에야 상업용 반도체 칩 생산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 20년 가까이이 소요되고 연구·개발(R&D) 비용 수십억 유로가 투입됐다.
미국은 자국과 첨단기술 패권을 다투는 중국이 EUV 기술을 확보하는 것을 전략적으로 차단해왔다. 2018년 들어 네덜란드 정부를 압박해 2019년부터 ASML EUV 장비의 중국 수출을 통제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EUV의 이전 세대 장비인 DUV 장비에 의존해야 했고, 5나노급 이하 초미세 공정의 칩을 양산할 수 없었다.
2022년에는 당시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첨단 반도체 장비 전반에 대한 포괄적 수출 통제를 도입하며 규제를 강화했다. ASML의 EUV 시스템은 한국과 대만, 일본 등 미국의 동맹국에만 공급되고 있다. 2023년부터는 DUV 장비마저 중국 수출을 통제했다. 중국이 현재 구입할 수 있는 노광장비는 DUV 노광장비로 이 가운데서도 트윈스캔 NXT:1980i 시스템과 같은 비교적 구형 장비만 살 수 있다.
ⓒ 자료: 외신종합
이보다 신형인 2050i, 2100i DUV 노광장비는 미국의 수출 규제로 구입할 수 없다. 삼성전자나 TSMC 같은 첨단 반도체 업체들은 DUV 이후 세대인 EUV 노광장비로 최첨단 미세공정을 마무리한다. ASML은 “EUV 노광장비가 중국에 판매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는 물론 파운드리, 그래픽처리장치(GPU)에 이어 EUV 기술까지 자립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EUV 개발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주도 아래 지난 6년 간 극비리에 이뤄졌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추진한 초대형 비밀 연구사업 ‘맨해튼 프로젝트’에 비유하며 ‘중국판 맨해튼 프로젝트’로 불린다. 중국은 이를 위해 ASML 출신 엔지니어를 대거 영입했다. 이 프로젝트 팀에는 은퇴한지 얼마되지 않은 중국계 ASML 출신 엔지니어와 과학자가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핵심 기술 정보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회사를 떠난 이후에는 직업 제약이 상대적으로 적어 주요 영입 대상으로 꼽혔다. 중국은 이들에게 계약금으로 최소 300만~500만 위안(약 6억 3000만~10억 5000만원)을 제시하고, 주택 구입 보조금까지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을 중심으로 ASML의 EUV 장비를 분해해 구조와 작동 방식 등을 파악하는 ‘역설계’ 방식으로 자체 EUV 시제품을 개발한 것이다.
중국은 구형 ASML 노광장비 부품을 얻기 위해 중고 시장도 적극 활용했다. 구형 장비에서 부품을 회수하거나 중고 시장을 통해 ASML 협력사 부품을 조달했다. 이 과정에서 최종 구매자를 숨기기 위해 중개회사 네트워크가 동원되기도 했다. 글로벌 은행이 주관하는 경매를 통해 구형 반도체 제조장비가 중국으로 유입됐으며, 올해 10월에도 중국 내 경매에서 ASML 노광장비가 거래됐다.
ⓒ 자료: 마켓츠 앤드 마켓츠/ 카빈 인베스트먼트
중국의 EUV 자립이 현실화할 경우 중국 반도체 생태계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도약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반도체 산업은 EUV 장비를 갖추지 못해 최첨단 공정으로 확장하지 못했다. 예컨대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중신궈지(中芯國際·SMIC)는 DUV 장비로 기술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7나노급 공정까지 구현했지만, TSMC나 삼성이 보유한 3나노급 이하 공정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이 이번 프로토타입 개발을 계기로 EUV 장비를 자체 확보할 경우에는 한국과 대만을 추격하는 속도를 높일 수 있다.
다만 중국이 EUV 장비 생산에 필수인 부품을 구하기 어려워 자체 개발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ASML 장비에는 독일 자이스의 광학계가 들어간다. 자이스의 초정밀 광학계는 EUV 빛을 반사하고 초점을 맞춰주는 역할을 한다. 중국과학원(CAS)이 프로토타입 광학시스템을 구축했지만, 아직 정밀도와 내구성이 확보되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프로토타입을 구축할 때도 ASML의 중고 제품이나 일본 니콘과 캐논의 부품이 활용됐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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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규환 국제에디터
